“이 책의 내용은, 국내와 해외의 현장에서 기자들이 못다 쓴 이야기를 모은 역사의 비하인드 스토리라 하겠습니다. 그들이 취재 보도했던 내용이 역사의 증거물로 남아 기록유산으로 영원히 숨을 쉬기도 하거니와 그 내용으로 인해 역사의 진실이 뒤늦게나마 밝혀지기도 합니다. 매 편의 글에서 독자들은 이제까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는 감동과 함께 재미를 느끼시리라 확신합니다.”
이 책을 엮은 이병대 대한언론인회 회장의 발간사다. 서평이랍시고 여기에 무슨 말을 붙이는 것은 췌사(贅辭)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책을 읽은 후에 흥감을 이기지 못하고 무어라고 떠들고 싶어졌다. 한국 현대사의 현장을 눈 앞에서 직접 보고 겪은 듯한 느낌 때문일 것이다.
원로 기자들의 모임인 대한언론인회는 지난 2011년부터 책 ‘그때 그 현장 못다한 말’을 출간해왔다. 그동안 5권이 나왔는데, 거기서 뽑은 16편의 글이 이번 책 ‘취재현장의 목격자들’의 2부를 구성한다. 올해 새로 받은 원고 17편이 1부를 이룬다. 모두 33명의 필자가 참여한 셈이다.
유자효(전 SBS 이사·시인) 편집장은 “새로 청탁해 받은 열일곱 분의 원고를 필자들이 다룬 시대 순으로 배열해 놓고 보니 그대로 한국의 현대사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한국 언론사의 첫 기자 위창 오세창’을 기리는 글이 맨 앞. 1958년 12월 24일에 발생한 ‘24파동’에 관한 기록이 바로 뒤를 잇는다. 야당 의원들을 지하식당에 연금한 채 자유당 의원만으로 국가보안법 등을 통과시킨 사건. 이를 지켜본 기자들의 비통한 심정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최서영 전 경향신문 정치부장은 제2공화국의 혼란상을 증언하며 오늘의 우리 모습을 되비쳐본다. 이 글은 2부에 수록된 ‘장도영 장군 50일’(한기호 전 서울신문 정치부 기자)과 짝을 이룬다. 장도영 5·16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의 몰락 과정을 담은 글이다.
최 전 부장은 KBS로 이직해 겪었던 현대사의 비사를 이번에 공개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된 10·26 사건이 일어났던 날의 숨은 이야기. 대통령의 마지막 행사는, 공표된 것처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이 아니라 KBS 당진 송신소 방문이었다는 것이다. 공산권에 대한 심리전 방송 시설이었기 때문에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고 한다. 송신소는 중앙정보부 사업이었는데, 당시 실세 차지철이 김재규 중정부장의 대통령 동행을 막았던 탓에 김 부장이 격분했다. 이것이 그날 밤 총격 사건의 기폭제가 됐다는 이야기다.
이미지 크게보기 1961년 5·16 직후 장도영(왼쪽 사진 왼쪽) 육군 참모총장이 박정희 장군과 함께 중앙청 광장에 나타나자 기자들이 열띤 취재 경쟁을 벌이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1960년대 남북 군사정전위원회 본회를 취재하던 남북 기자들이 판문점에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 청미디어 제공
신경식 대한민국헌정회 회장은 신문 기자 시절에 판문점을 취재한 경험을 되짚어본다. 이수근 북한 노동신문 부사장의 탈출 과정이 기자들의 특종 경쟁 스토리와 함께 박진감 있게 펼쳐진다. 이 후일담은 2부에 수록된 글 ‘평양에서 만난 세 여인들의 추억’(금창태 전 시사저널 사장)을 애틋하게 만드는 전주(前奏)다. 금 전 사장은 1984년과 2000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만났던 인민배우 문예봉, 몽양 여운형의 딸 여연구, 빨치산 이현상의 딸 이상진에 대한 느낌을 반추한다. “그것은 단순히 여성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동토의 공화국에서 분단의 비극을 한 몸에 지니고 체제의 꼭두각시로 기구한 삶을 살다간 ‘비운의 여인’에 대한 연민이었다.”
김진현 전 동아일보 논설주간은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지원으로 외국언론인 기자클럽을 만들려다가 좌절된 전말을 기록했다. 그는 이 글에서 1999년 대우 사태와 2016년 대우조선해양 부실 사태의 본질을 꿰뚫는다. 자신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국민 세금을 뜯어먹으려 하는 리더십이 낳은 비극.
김경철 전 한국신문협회 부회장은 경제 분야 취재를 오래 한 경험을 되짚어 대기업들의 성장과 몰락 과정을 증언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10대 그룹 회장 초청 만찬에서 성금을 많이 냈다며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을 칭찬했다는 일화는, 오늘 우리 상황을 되돌아보게 하며 쓴웃음을 짓게 한다.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신문사 편집국장 시절에 긴급 조치 상황임에도 개헌을 언급했던 용기를 자랑했다. 그런 한편, 자신이 ‘점차 변화하여 타협적이 되고, 아니 오히려 시대에 순응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는 것을 고백했다.
이 책의 글들이 사초(史草)가 될 수 있는 것은, 오보와 같이 부끄러운 것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현장에서 뜨겁게 겪은 사건을 세월이 지난 후 부감(俯瞰)으로 넓고 깊게 조망하고 있어서다.
문장의 대가들이 쓴 ‘작품’인만큼 인터넷 시대의 날림 글들과 격을 달리한다는 것. 언론학을 공부하는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이유다.
장재선 기자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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