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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종 논설위원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결정한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 ‘탈퇴’가 51.9%, ‘잔류’가 48.1%를 얻었다. 어디서 본 듯한 수치여서 찾아보니 지난 2012년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얻은 51.6%, 문재인 후보의 48.0% 득표율과 소수점 이하 차이만 있을 뿐 쌍둥이처럼 똑같다. 투표율도 브렉시트가 72.2%, 한국 대선이 75.8%로 비슷하다. 전혀 성격이 다른 투표이지만 이렇게 투표 결과가 닮은 것을 보면 같은 시대 두 나라가 안고 있는 고민과 갈등이 기시감(旣視感)처럼 다가온다.

우선, 두 투표 결과만 보면 사회가 분명하게 양분돼 있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승부가 나버리면 패배한 쪽에서 승복하기가 쉽지 않다. 당초 예상과 달리 브렉시트가 현실화하자 영국 사회는 ‘멘붕’에 빠졌다. 뒤늦게 구글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 단어가 ‘EU가 뭐예요?(What is the EU)’라거나, 해리 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은 트위터에 “지금처럼 (투표 결과를 잔류로 바꿔줄) 마법을 원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고 말한 것을 보면 후유증과 허탈감이 간단치 않다. 벌써 재투표를 요구하는 청원 서명이 400만 명을 넘었다고 하니 영국 사회가 브렉시트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우리도 지난 4년간 여야는 대선 결과 승복을 놓고 치열한 줄다리기를 해 왔다. 문재인 전 대표는 패배한 지 1년을 채 넘기기도 전에 재도전 의사를 밝혔다. 야당은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을 시작으로 국정(國政)보다는 박근혜정부의 정통성을 끊임없이 흠집내는 데 몰두했다. 2%포인트만 가져왔어도 결과가 뒤바뀔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 야권 지지자들을 결집시키고 재도전의 의지를 키워온 것이다.

이렇게 지지층의 유동성이 적으면 각 진영은 채 10%도 안 되는 부동층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이 부동층은 후보의 이미지나 대형 공약(公約), 이성보다는 감성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브렉시트 선거전에서 탈퇴파가 ‘이민자들이 대거 몰려와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나 미국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테러와 이슬람 혐오를 증폭시키는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세계적인 흐름과 국내 상황을 보면 내년 대선에서 각 진영은 모두 ‘격차(隔差) 해소’를 내세우면서 뭔가 이 부동층을 확 끌어올 수 있는 자극적인 공약을 준비할 수밖에 없다. 지난주 국회 원내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한목소리로 격차 해소를 다짐했다. 이를 위해 가진 자 즉 재벌에 대한 개혁을 약속했다. 최근 일부 재벌이 보여주고 있는 재산 다툼, 사생활, 갑질 행태를 보면 대중의 공분을 증폭시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구의역 사고에서 드러난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별은 청년 실업에 시달리는 젊은 층의 분노 에너지를 최고조로 쌓이게 해 언젠가는 분출구를 찾을 것이다. 후보들은 이런 감성을 적극 자극해 표를 얻으려 할 것이 뻔하다.

그러나 브렉시트 투표에서도 보듯 포퓰리즘적 접근의 결과는 상상하기 힘든 재앙으로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책과 노선의 실패를 탓하기보다는 희생양을 찾으려는 속성이 강하다. 사실 김영삼정부 말기의 외환위기, 김대중정부의 벤처와 카드대란, 노무현정부의 부동산 투기, 이명박정부의 국제 금융위기 등은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게다가 무상(無償) 시리즈 논란은 심리적 간극을 더 넓혔다. 정책의 실패를 기업의 탐욕으로 치환해 희생양을 찾으려는 정치권의 시도는 대중에게 통할는지 모르지만 그 후유증은 더 큰 재앙을 초래한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의 많은 글로벌 금융 기업과 주요 투자 기업들이 속속 철수를 검토해 당장 50만 개의 일자리가 없어지는 현실을 과연 대중이 감내할 수 있을까.

눈앞의 선거 승리를 위해 2013년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공약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의 도박은 결국 나라를 갈가리 찢어 놓는 자충수로 끝났다. 내년 대선은 개헌이라는 정치적 이슈와 더불어 격차 해소 대안이 봇물처럼 터져 나올 것이다. 양극화를 줄여나갈 대책을 진지하게 검토하기는커녕 포퓰리즘 공약으로 표를 얻을 생각만 한다면 ‘한국판 브렉시트’가 없으리란 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