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일러스트=송재우 기자 jaewoo@

생존 우선하면 속물로 전락해
물정 알지만 속되지는 말아야

독서·음악감상 등 문화생활
‘삶의 가치’찾고 다듬는 연습

‘해보지 않은것’까지 포용해야
‘잔혹한 현실 미래 허무’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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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인생의 절정이 서른 무렵에 온다고 여겼다. 강건한 육체, 뜨거운 가슴, 순수한 이상이 백열(白熱)하면서 세상의 어둠을 정화할 최적의 때라고 믿었다. 지금은 당연히 안다. 삶이 진짜로 고조되는 순간은 넉넉히 세상을 배우면서 최소한 스무 해는 더 지나야 한다는 것을.

사람은 네 차례에 걸쳐 운명을 다시 받는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정해진 대로 살지 않고, 어제의 삶으로 오늘의 명(命)을 새롭게 하는 혁명의 연속으로써 삶을 이룬다. 일찍이 공자는 인생을 자술하면서 하나의 삶에서 또 다른 삶으로 뛰어오르는 도약의 순간을 기록한 바 있다.

사람의 첫 번째 운명은 태어나면서 받는다. 아무도 부모를 고를 수 없으므로 이 운명은 어쩔 수 없는 것, 즉 숙명(宿命)의 형태를 띤다. 공자는 이때를 입에 담지 않았다. 네 번째 운명은 당연히 죽으면서 받는다. 더 이상 진행이 없고 뒷사람 손에 전적으로 달렸으므로, 이 운명을 종명(終命)이라고 한다. 산사람 일에만 관심을 두었던 공자는 역시 이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두 번째 운명은 열다섯 살 무렵에 내려온다. 세상에 대한 작은 배움을 디딤돌 삼아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늠할 나이다. 공자는 이때 배움에 뜻을 두었다. 스스로 운명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이 운명은 입명(立命)이라 부를 만하다.

세 번째 운명은 쉰 살 무렵에야 찾아온다. 몸에는 오랜 경험이 쌓여 물정을 짐작할 만한 성숙의 때이기도 하고, 마음으로는 이 세상에 와서 이룩할 바를 작정하는 대망의 시기이기도 하다. 공자는 이 나이에 비로소 하늘의 명을 알았다(知天命)고 했다. 하늘이 움직이고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에 작게나마 부합하려 한다는 점에서 이 운명은 소명(召命)이라고 할 만하다.

소명이 있기에 50대는 인생의 진정한 절정일 수 있다. 몸은 충분히 건강해 세상을 호령할 만하고, 체험은 겹겹이 짜여 현실을 떠받치며, 정신은 무르익어 지혜의 빛을 띠어간다. 어느 길로 가더라도 좀처럼 방향을 잃지 않고, 어떤 일을 하더라도 도리에 그다지 어긋나지 않는다. 집안에서는 사랑을 얻고 조직에서는 존경을 받기에 정말로 좋은 나이다.

그러나 한국의 50대에게 삶은 오히려 잔혹극이기 십상이다. 마음은 자유를 갈망하지만, 육체는 현실에 묶여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부모는 연로해서 돌봄을 눈치 주고, 아이는 자랐으나 독립하기에는 아직 멀었다. 교육비에, 의료비에, 주거비까지…. 세상은 부싯돌 한 줌 마련할 틈조차 주지 않은 채 자꾸만 은퇴를 재촉한다.

삶의 이러한 잔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끈질긴 투쟁 없이 소명은 결코 얻을 수 없다. 생존이 우선하면 사람은 쉽게 속물로 전락한다. 물정은 알지만 속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지혜가 찾아온다. 외적 고통을 내적 기쁨으로 전환하는 기적의 축적이 바로 인간됨의 근거다. 현실을 무시하고 정신승리법을 택하자는 것이 아니다. 경험이 가르치는 규칙대로만 살아가는 ‘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야말로 오히려 최악의 정신승리법이다. 해봐서 아는 현실은 이미 머나먼 과거에 있다.

문화는 ‘내가 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한다. 살아온 대로 살아가지 않으려면,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삶의 진실에 공감할 기회를 늘려갈 수밖에 없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여행을 가는 것은 자기로부터 낯설어져서 삶의 가치를 다듬기 위한 중대한 연습에 속한다. 이러한 연습 없이 그 누구도 지금의 끔찍함과 다가올 허무를 물리칠 수 없다.

50대는 이전의 어떤 세대보다 열심히 인간적 삶의 의미를 묻고 대안적 삶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인문적 갈증에 시달리는 중이다. 그러나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마름은 해소되지 않는다. 읽고 듣고 보고 쓰는 문화적 향유를 통해 다른 삶의 가능성을 불러들이고 내면으로부터 공명을 일으키는 사색의 시간을 통해서만 가혹한 현실의 좌절과 우울을 넘어 예비되지 않은 미래를 살아갈 수 있다. 삶의 절정에 오른 지금, 오늘의 50대가 문화에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은수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