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민경갑 /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화가

10개월째 공석인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정부가 외국인 임용도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미술계가 연일 들끓고 있다. 이와 관련, 얼마 전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외국인 12명을 포함해 총 22명이 국립현대미술관장 재공모에 지원했다고 밝혔다. 김 장관은 현대미술이 국적을 초월한 상황에서 한국인 관장이어야 한다는 건 이치에 닿지 않기 때문에 공정한 심사를 통해 가능성을 열어 놓고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원칙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수장을 뽑는 일인 만큼 급히 서두를 게 아니라, 좀 더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국립현대미술관장은 현대적인 감각에 국제적인 안목도 갖춰야 한다. 그런 점에서 외국인 관장이 적격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국립현대미술관장의 능력은 한국인 작가 그리고 국민과의 원활한 소통이다.

우선,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 개개인의 성격이나, 화업(畵業)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작가와 제대로 소통 못 하는 미술관장은 대외적으로만 미술관을 대표하는 ‘바지사장’으로 전락할 수 있다. 한국인 관장으로서 국내 작가들과 공감할 수 있는 관장만이 국민적 정서에 가깝게 다가가면서, 국제적으로도 호응을 얻을 수 있는 , ‘우리만의 색깔이 뚜렷한 전시’를 만들어낼 수 있다.

예술에도 정체성(正體性)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한국의 미술계를 대표하는 국립현대미술관장이라면 우리만의 정체성, 그 혼을 지닌 인물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외국에서 나고 자란 ‘파란 눈의 관장’은 그 같은 혼을 결코 지닐 수 없다. 한 개인의 의식 속에 국가의 정체성은 단시일 내에 형성되지 않는다. 오랜 경험의 누적과 사유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같은 정체성은 유럽과 북미 중심으로 진행돼온 근현대 미술사의 흐름을 동양으로 되돌리고, 그 중심에 한국미술을 내세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미술관은 국민을 위해 중요한 교육의 장(場)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미술사의 흐름에 의미 있는 전시뿐 아니라 다양한 교육·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내 국민감정을 고양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우리 전통인 민족문화 발전을 위해서라도 국립현대미술관이 앞장서야 할 일이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이 한국인의 혼을 지닌 인물이어야 한다는 결론도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온다.

문득 이런 생각마저 든다. 만약 해외에 우리 전통 음식을 소개해야 하는 행사가 있는데 외국인들의 입맛과 취향을 고려해야 한다며 외국인 요리사를 고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장은 국적 불명의 그 같은 ‘퓨전’ 음식에 호평이 쏟아질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외국인 미식가들은 자기네 음식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한식 탈을 쓴 양식’을 외면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외국인 관장이 필요하다면 우리 미술관을 내국인 관장이 맡아 운영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놓은 다음, 임용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 미술계에도 찾아보면 미술적 안목에 행정적 능력까지 겸비한 전문가가 많다. 미덥지 못하면 제도와 시스템으로 보완하면 된다.

마침 주무 부처인 문체부도 정부 조직 체계에 갇힌 미술관의 조직 위상을 일신해 민간 영역의 창의성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술관 법인화를 추진 중이다. 또 현대미술관장의 지위를 차관급으로 승격하고 지역별로 안배해 부관장을 두거나 미술관별로 관장을 따로 두는 등 미술관 체계를 개선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장 자리를 놓고 겪는 진통이 우리 미술계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