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조선 귀족제의 모태는 화족(華族), 즉 일본의 귀족제도이다. 화족은 메이지(明治) 정부와 함께 생겨나 1947년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기까지 존속한 근대 일본의 귀족 계급이다. 화족은 1869년 판적봉환(版籍奉還)을 기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판적봉환이란 영주들이 자신들의 영지(領地)와 영민(領民), 즉 ‘판적’을 조정에 반환한 것을 말한다. 신정부가 판적봉환한 고케이(公卿·왕족)와 다이묘(大名·지방의 영토를 다스리고 권력을 행사했던 유력자)에게 화족이란 칭호를 내린 것. 이들은 한페이(藩屛·황실의 수호자)로 불리며 일반 국민과 다른 의무와 특권을 부여받았다.

화족제는 사실 다이묘를 다스리기 위한 일종의 불만 완화 정책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봉건제를 철폐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면서 ‘사민평등(四民平等)’을 내세웠다. 그러나 기존 지배층을 화족으로 이름만 바꿔 유지했다. 가와사키(川崎) 시민박물관의 유모토 고이치(湯本豪一) 학예원은 ‘일본 근대의 풍경’(그린비)에서 이를 ‘기묘한 평등’이라고 평한다. “천황의 일족은 황족으로, 고케이와 다이묘 등 최고 권력층은 화족이라는 귀족 신분으로 남겨두고 사(士)를 제외한 농민·수공업자·상인 등의 피지배계급만 평민으로 평등화시켰던 것”이라며 ‘위로부터의 개혁’의 한계를 지적했다.

화족 제도는 1884년 화족령의 발포로 변화를 겪는다. 이때 공·후·백·자·남작 등 5작위가 만들어졌는데, 주로 메이지 정부를 수립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이 작위를 얻었고 점차 군인, 관리, 그리고 경제인까지 그 범위가 대폭 확대됐다. ‘벼락출세’ 화족과 작위 난발(亂發)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도 거세졌다. 특히, 전시(戰時)에는 작위 부여가 더욱 속출했는데, 청일전쟁(1894∼1895) 직후 오사카마이니치(大阪每日)신문은 “새로운 화족이 우후죽순처럼 그리고 부패물의 박테리아처럼 우글거리며 생겨나는 것을 보고 우리는 다만 어처구니없어 할 따름이다”라며 비판하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화족은 1890년 처음 열린 제국의회에서도 상당한 의석을 차지했다. 귀족원(貴族院)과 중의원(衆議院)의 이원제였는데, 이 중 귀족원은 황족의원(성년이 된 황족 남자), 화족의원, 국가에 공을 세우거나 학식이 있는 자 중 칙임(勅任)된 의원 등으로 구성됐다. 화족의원은 다시 공·후작 의원(세습)과 백·자·남작 의원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30세 이상의 남자면 모두 가능했고, 후자는 작위를 가진 자 중 선거로 뽑았다. 임기는 7년, 작위마다 66명씩 뽑았다.

화족 자녀를 위한 교육기관도 별도로 존재했다. 1877년에 설립된 가쿠슈인(學習院·현 가쿠슈인대)으로, 천황의 지원 하에 130명의 화족 자녀들이 수업을 시작했다. 가쿠슈인은 대한제국 영친왕(1897∼1970), 이방자(1901∼1989) 여사, 덕혜옹주(1912∼1989)가 다닌 학교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52년 사립학교가 되었지만, 여전히 천황가의 학교로 유명하다. 가쿠슈인은 당시 황태자(나중의 다이쇼 일왕·1879∼1926)의 입학으로 보다 특별한 지위에 오른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