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윤덕여 여자축구 대표팀 감독이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 축구회관 앞에서 2015 여자월드컵 출전 국가대표팀의 사인볼을 보며 활짝 웃고 있다. 김선규 기자 ufokim@

女월드컵 ‘16강 신화’ 달성 윤덕여 감독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이 한국을 얼어붙게 했던 지난 6월. 캐나다에서 날아온 여자축구 대표팀의 사상 첫 월드컵 16강 진출 소식은 가뭄 끝에 단비보다도 훨씬 달콤한 뉴스였다.

국내 여자축구 등록선수는 1700여 명에 불과하지만, 23인의 국가대표팀은 불가능은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메르스 공포에 짓눌려 있던 국민들은 여자 대표팀의 투혼에 시름을 털어냈다. 그 힘겨운 목표 달성 뒤에는 윤덕여(54) 감독의 따뜻한 ‘아빠 리더십’이 숨어 있었다. 지난10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윤 감독을 만나 2015 캐나다 여자월드컵, 그리고 그의 축구철학을 들어봤다. 윤 감독은 “16강 진출은 선수들이 노력한 결과”라며 모든 공을 제자들에게 돌렸다.

◇지더라도 박수를 받자, 감동을 주자

―16강 진출의 고비는 스페인과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6월 18일)였다.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면서 사상 첫 16강 진출의 신화를 작성했다.

“0-1로 뒤진 상황에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비기거나 지면 16강 탈락이었다. 대표팀을 맡은 이후 가장 강한 톤으로 질책했다. 진지하고 엄숙하게 선수들을 꾸짖었다. 언성도 높였던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서 여자 대표 선수들을 설득하고, 또 집중력을 높였다. ‘국민들이 지켜보는데 마지막까지 해봐야 하지 않겠나. 2014 인천아시안게임 때 북한과의 경기를 떠올려 봐라. 그때 우리는 비록 졌지만 박수받았다. 감동을 줬기 때문이다. 이렇게 순순히 되돌아갈 수는 없다.’”

―의도한 대로 분위기가 달라졌나.

“그랬던 것 같다. 선수들도 마음은 같았을 테니까. 그래서인지 다행히 빠른 시간 안에 동점 골이 터졌다. 김수연은 역전 골까지 넣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더 실점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아마 경기를 뒤집긴 힘들었고 16강 진출도 물 건너 갔을 것이다. 전반전을 1골로 막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살이 빠진 것 같다.

“현지에서는 체중계 위에 올라갈 여유도 없었다. 한참 잊고 있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체중을 재봤다. 그랬더니 4㎏이나 빠져있더라. 평소 77㎏ 정도 나가는데 한 달여 동안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몸무게가 73㎏이 됐다. 덕분에 다이어트는 제대로 했다.”

◇선수들에겐 ‘노력하는’ 아빠, 집에선 ‘미안한’ 아빠

―여자 선수들을 지도하는 건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들과 소통했나.

“처음엔 어려웠다. 계속 남자 선수들만 상대하다가 처음 여자 대표팀을 맡고 고민을 많이 했다. 나름대로 이것저것 노력을 많이 했다. 우선 선수들과 빨리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에 선수들의 사진을 구해 이름과 대조하면서 얼굴을 익혔다. 처음으로 소집하던 날 얼굴을 보면서 일일이 이름을 불러주니 선수들이 활짝 웃었다. 여자 선수들이 아마도 그렇게 관심을 받았던 적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요즘 젊은 친구들의 관심사를 공부했다. 일부러 인기 영화와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눌 화제를 준비해뒀다. 영화 ‘7번 방의 선물’이 한창 흥행하던 때였는데 그 영화 속 꼬마 여주인공 이름을 언급하면서 대표 선수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더니 반겨주더라. 금세 친해졌다. ‘개그콘서트’ 같은 프로그램도 열심히 봤다. 사정을 모르는 아내는 이런 나를 두고 ‘안 하던 짓을 한다’며 의아해했다.”

―여자 선수들이기에 난처한 순간도 있었을 텐데.

“그런 기억은 별로 없다. 여자 선수들의 특성상 신체적 변화에 대해서는 여자 코치의 보고를 받아 확인했다. 그래서 지난 30개월 동안 특별한 문제나 마찰은 없었던 것 같다. 여자 선수들은 자존심이 특히 세다. 대놓고 혼내고 그러면 금방 기가 죽고 소극적으로 변한다. 경기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말이나 행동을 더욱 조심하려고 특히 신경 썼다.”

―그 정도면 선수들도 감동했을 것 같다.

“처음에 그렇게 어색해하던 선수들이 차차 마음의 문을 여는 게 보였다. 서로 관심 있는 화제를 찾고 배려하다 보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선수 중에는 일상생활에서 고민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 어느 때부턴가 선수들이 먼저 다가와서 개인 사정을 털어놓고 상담했다.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함께 풀기 위해 노력했다. 비밀을 보장했다. 훨씬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래도 감독이라는 직책을 어려워하는 건 있다.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

―그럼 집에선 어떤 아빠인가.

“28세인 큰딸과 23세 아들이 있다. 여자 대표팀 선수들과 비슷한 나이다. 큰딸은 일반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신상이 언론에 공개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아들은 대학생이다.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잘해준 게 별로 없다. 휴일에도 시간이 서로 엇갈려 얼굴도 자주 못 본다. 특히 큰딸과의 추억이 별로 없는데 그게 늘 미안하다. 아내와는 가끔 집 근처 일산 호수공원에 산책가는 게 전부다.”

◇헐렁한 바지 안 입는 패셔니스타

―항상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원래 패션에 신경 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프로팀에서 남자 선수들과 오래 생활하다 보니 대개 트레이닝복을 입었다. 그런데 여자 선수들을 맡고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아저씨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패션에서부터 그들과 통해야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통이 헐렁한 바지는 다 버리고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로 정장을 구매했다. 헤어스타일에도 신경 썼다. 아무리 훈련에 나가더라도 부스스한 머리는 피했다. 이렇게 하는 게 서로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왠지 큰딸이 조언해줬을 것 같다.

“그런 건 별로 없다. 워낙 말도 없으니…. 그러나 한 번은 큰딸이 조용히 향수를 선물해줬다. 여자 선수들 앞에서 깔끔하게 하고 다녀야 한다고, 냄새나는 아저씨는 싫어한다고…. 의외였다. 기특하고 고마웠다.”

―딸 같은 선수들, 아빠 같은 감독, 그래서 ‘아빠 리더십’이 나왔나 보다.

“여자 선수들은 모두 내 딸이나 다름없다. 나이가 그렇고 생각하는 게 그렇다. 오히려 사회생활하는 딸보다 운동만 하는 선수들이 훨씬 여리고 순진한 측면이 있다. 그들을 우리 딸 같은 아이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마 최근 여러분들이 제게 ‘아빠 리더십’이라는 말을 자주 하시는 것 같다.”

◇리더십의 조건,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야”

―스스로 생각하는 리더십의 조건이 있다면.

“지도자로서 가장 중요한 건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억지로 휘어잡는 게 아니라 부드럽게 이끌고 가야 한다. 그게 진짜 카리스마다. 선수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 여자 선수들은 특히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처음 부임할 때의 지도 철학이기도 했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건 지금이나 그때나 변함이 없다.”

―여자 대표팀 사령탑 재계약이 유력시되는데.

“여자 대표팀 선수들과 생활한 지도 벌써 30개월이 지났다. 지도자로서 선수들과 함께할 때 가장 행복했다. 기회가 된다면 계속하고 싶다. 그러나 그건 협회의 결정사항이다. 정식으로 (재계약) 제의가 온다면 그때 생각하겠다.”

―여자 축구의 발전을 위해 조언을 해준다면.

“이미 대한축구협회에서 여자축구 태스크포스(TF) 팀을 발족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 월드컵이 우리 여자축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저변이 확대돼 더 많은 선수와 팀이 나왔으면 한다. 유럽처럼 프로팀에서 여자팀을 운영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이번 여자 대표팀이 2002 한·일 월드컵 남자 대표팀처럼 앞으로 여자 축구계의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