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지난 11일 대전 유성구 구성동 카이스트 캠퍼스에서 이덕주 교수가 모형헬기를 손에 들고 헬기의 비행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대전 = 신창섭 기자 bluesky@

이덕주 카이스트 항공우주공학과 교수

이덕주(61) 카이스트 항공우주공학과 교수는 국산 헬리콥터 개발사의 살아 있는 증인으로 불린다. 1977년 서울대 항공공학과 졸업, 미국 스탠퍼드대 항공우주공학과 석·박사 학위 취득, 3년간 나사(미 항공우주국) 연구원 역임, 1988년부터 현재까지 카이스트 교수로 27년째 재직하는 등, 그의 경력 대부분은 불모지나 마찬가지였던 국내 헬기산업을 오늘날 수준으로 발전시키는데 바쳐졌다.

제트엔진과 헬리콥터에 나오는 소음과 음파 등을 공기역학적으로 연구하는 공력음향학(Aero Acoustics) 연구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꼽히면서 국방분야 국책사업인 한국형 헬기 개발사업(KHP수리온기 개발 사업)에 참여했고, 차세대 모델인 민수·군용 겸용 헬기 통합 태스크 팀장을 역임했다.

이소연 우주인 프로젝트, 나로호 발사 등과도 관련된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해온 이 교수는 한국 항공기술 발전을 주도해온 개척자이지만 정작 자신에 대한 평가는 ‘파이오니어(Pioneer·개척자)’가 아닌 ‘어시스턴트(Assistant·조력자)’라는 호칭도 과분하다며 겸손해 했다.

이 교수는 지난 5월 국내 최초로 미국 헬리콥터 학회 부회장으로 선출됐다. 오는 7월부터 2년간 부회장으로 아시아, 호주, 러시아 지역을 담당한다. 미국 헬리콥터 학회는 1943년 창립 이래 6800여 명의 회원이 등록한 동일 분야 최대 학회로 이사회는 헬기 제조사로 유명한 시콜스키사 회장을 비롯한 회전익 분야 전무가 30명으로 구성돼 있다. 지난 11일 대전 유성구 구성동 카이스트 항공우주공학과 항공 실험실에서 만난 이 교수는 “항공분야로 치면 제가 2세대 공학자로 선배 석학들도 여러분 계시는데 제가 조명받는 것은 과분한 느낌도 있다”며 “국내 헬기 산업은 기계, 철강, 재료, 정보기술(IT) 등 연관 산업분야의 발전과 군·산·학·연의 협력을 통해 가까운 장래에 세계 시장에서 선진국과 겨룰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할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학창 시절의 꿈과 항공공학과 진로를 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렸을 때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살았는데 아버님이 공군에 복무하셨고 영등포 공군본부에 몇 번 놀러 가기도 했습니다. 항공 쪽과 인연은 아마 이때 처음 시작된 것 같은데요. 하지만 중학교 때는 조각반에 들어서 실물 크기 전신상을 만들기도 했고 미대에 갈까도 생각했었습니다. 경기고로 진학한 이후 DNA 발견 소식을 표지로 한 타임지를 보게 된 이후에는 미생물학을 전공하거나 의대에 가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다가 진학을 앞두고 항공으로 급선회를 하게 됐는데 이유는 서울대 항공과에 가까운 친척분이 교수로 계셨고, 아버님도 공군이셨기 때문입니다. 항공은 미개척분야라는 점이 가장 끌렸습니다. 당시 아폴로 로켓이 발사돼 TV에서 중계도 되어서 저도 흥미가 있었습니다.”

―육군 헬기부대 소대장으로 근무하면서 헬기와 첫 인연을 맺게 되셨다던데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항공학도가 된 다음부터는 항공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습니다. 항공사를 세우겠다고 하여 친구와 함께 회사이름을 ‘Lee Air Line’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머리를 길러도 보고 빡빡 밀어도 보고요.(웃음) 원래 남 앞에서 말도 잘못하는 성격인데, 2학년부터는 과대표도 하면서 학교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3학년 때부터는 여름방학마다 훈련받는 ROTC를 했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경남 진해에 있는 육군 수송 학교에서 장교훈련을 받았는데 이때가 헬기와 평생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습니다. 경기 성남에 있던 헬리콥터 정비부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는데 날개, 통신 장비 등 부품을 정비하는 부대여서 항공학도로서 아주 유익했습니다. 또 ‘500MD’ , ‘코브라’ 이런 헬기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외국 공급사 인력이 컴퓨터 작동과 부품 교육도 직접 교육도 해서 이를 체험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보냈고 결국 이게 평생 진로가 됐습니다.”

―나사 연구원 재직 당시엔 어떤 업무를 하셨나요. 또 안정된 일자리를 그만두고 귀국을 결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스탠퍼드대 석사 시절부터 가까운 실리콘 밸리에 있는 나사에 가서 몇 시간씩 근무했어요. 나사에 헬리콥터가 실물로 들어가는 세계에서 제일 큰 풍동 실험실에서 복잡한 헬리콥터 현상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모사)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소리가 어떻게 나는지를 연구했어요. 당시 헬리콥터 소음은 군에서 가장 큰 관심거리였는데 적에게 일찍 노출되면 위험해 소음을 줄이며 비행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죠. 나사에서는 헬기 비행 시 나타나는 물리적 현상을 시뮬레이션해 실제로 소리를 줄이는 연구를 담당했습니다. 당시 저는 미국 유학을 해도 당연히 귀국할 생각이었어요. 한국의 연구 여건도 좋아졌다고 판단됐고, 카이스트도 항공과가 설립돼 전 세계 유명 석학들이 강의도 하셨던 터라, 카이스트에 간다는 것이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미개척분야인 헬리콥터 분야를 한국에 가서 연구하면 좋은 성과도 낼 수 있고, 학생 때 생각했던 항공회사 이름도 아직 아른거릴 때였습니다.”

―2012년 배치된 한국의 첫 국산 군용헬기인 수리온 개발 과정에도 참여하신 것으로 아는데요.

“수리온은 유럽헬기를 모델로 기술협력을 받아 설계하고 제작했지만 유럽헬기와 똑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날개를 약간 바꾸었습니다. 한 번도 실험한 적이 없는 날개라 검증을 받는 게 어려웠습니다. 국내 기술진과 유럽회사 간의 날개 실험 예측값이 크게 차이나 혼선이 빚어지던 2010년 막바지 설계 결정 과정에서 긴급하게 카이스트 연구팀이 투입돼 3개월간 시뮬레이션 검증을 완료해 오류를 해소했습니다. 또 다른 난제는 기체 중량을 1만6000파운드에서 적정선으로 줄이는 과정에서 큰 진통을 겪었고 영하 40도의 알래스카 극한 환경에서 성공적인 비행이 가능한지 보는 테스트 비행, 비행 시 심한 진동을 줄이는 과제 등 하나같이 난제들이었지만 결국 극복해냈습니다.”

―현재 한국 헬리콥터 산업의 수준은 세계적으로 어떤 위치입니까.

“우리나라 군 헬기보유 수준은 전 세계 5위입니다. 2차 대전 이후 헬기가 군사적으로 유용한 수단으로 처음 입증된 것이 바로 한국전쟁이었습니다. 산악과 골짜기가 주를 이루는 지형 특징상 헬기만큼 공중 공격과 수송 등 작전능력을 가진 수단을 찾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수리온은 국내개발 기종으로 기존 UH1H 노후기종을 대체하기 위해 국가사업으로 진행했습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도입된 500MD와 코브라 대체 사업으로 2021년까지 총 1조3000억 원이 투자되는 LCH-LAH(소형무장·민수헬기)개발사업이 또 올해부터 진행됩니다. 수리온이 유럽기술협력으로 만들어졌지만 대부분 우리 손으로 만들어졌어요. 이제는 실전부대 배치가 돼서 깐깐하기로 유명한 우리나라 조종사로부터 매우 안정적이라는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올해부터 개발이 착수되는 차세대 국산 헬기는 민수용으로도 만들어져서 공공 재난 등 분야에서도 많이 사용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항공우주연구원에서 개발한 무인헬기 ‘틸트로터’는 전 세계에서 독보적인 기술로 평가됩니다. 올해 미국헬기학회에 특별 초청돼서 발표된 바도 있습니다.”

―헬기 산업 발전을 위한 대안과 정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우리나라 헬기, 회전익분야의 잠재력은 매우 큽니다. 세계 헬기시장 규모는 조선시장 규모와 맞먹는다고 합니다. 정부에서는 우리나라의 기술의 뛰어난 점을 인식하고 산업, 연구소 학교 그리고 군·공공기관이 협력하면 좋은 미래가 펼쳐질 것으로 확신합니다. 우선 1조3000억 원을 들인 수리온을 국내 공공기관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정부 조달 구매 규정을 개선해야 합니다. 1대당 200억∼250억 원 정도 하는데 국내 소방, 산불진화 등 재난 분야에서 사용 실적을 쌓으면 자연스레 수출로 이어질 것입니다. 수리온 의무헬기 부대가 올해 창설되는 시점에 맞춰 정부 관련 부처들이 협력해줘야 합니다. 새로 시작하는 민군겸용 헬기개발 사업 과정에서 우리가 아직 취약한 헬기 날개 설계, 비행 제어장치, 트랜스미션 기술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젊은 공학도들이 최대한 참여할 수 있게 정책적으로 뒷받침해줘야 합니다.”

―국내 최초로 미국 헬리콥터학회 부회장에 선임되셨는데 향후 활동 계획은 무엇입니까.

“부회장은 학회 20여 분의 임원 중 한사람으로 향후 헬기산업 발전을 위한 연구, 개발 그리고 협력 방향을 제시하고 결정하는 이사회에 참석하고 의결합니다. 회장은 시콜스키 사장, 부회장은 유럽대표로 에어버스헬리콥터 기술부회장, 또 미국의 보잉, 벨, 시콜스키 항공사의 책임자들과 미 육군, 나사, 유럽 항공연구기관 헬기 책임자 등 그야말로 전 세계 헬기의 고위 책임자 모임입니다. 저는 아시아, 호주 그리고 러시아 지역을 담당하고 매년 헬기 관련 모임 등을 주관하고 이사회에 참여합니다. 이밖에 아시아·호주 회전익 포럼을 한국에서 2012년도에 처음 열고 제가 제1회 대회장을 지냈고 오는 11월 인도에서 열리는 아시아 호주 회전익 포럼 기조연설도 제가 할 예정입니다. 17명의 석·박사 과정 제자들과 무인기, 해상풍력, 자동차 소음, 우주발사체 제트소음 등 여러 외부수탁 연구 과제를 수행하고, 방위사업청·경남 사천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을 오가느라 24시간이 부족할 지경이지만 앞으로 안전한 헬기를 위한 조종사의 역할에 대한 연구를 시작할 생각입니다. 기계뿐 아니라 이것을 조작하는 조종사의 심리 안정이 요구되는데 심도 있고 근본적인 연구가 아직 외국에서도 부족합니다. 또 우리나라의 우수한 수리온 등 개발된 헬기와 틸트로터 등 무인헬기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것도 부회장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전 = 김창희 기자 ch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