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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진수 / 논설위원

중세 수도원 수사들의 묵상수행법인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는 성경 구절을 되뇌면서 마음에 스며들도록 하는 독서였다. 그 전통이 오늘날 서구의 도시에서 부활했다.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과 미국의 보스턴 등지에서는 현대판 ‘거룩한 독서’인 ‘슬로 리딩’(slow reading·천천히 책읽기)이나 ‘묵독(默讀) 파티’ 등의 모임이 늘고 있다. 커피숍 등에 모여 휴대전화는 물론 서로 대화도 없이 1∼2시간씩 책만 읽는다. 이런 방식의 모임은 ‘디지털 디톡스’(digital detox·디지털 해독)의 일환이다. 디지털 단식을 하면 스마트폰 의존증에서 차츰 벗어날 수 있다. 스마트폰 중독이 심해지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극단적인 경우 대인 기피 현상까지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이런 모임이 많이 생겼다. 각자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그저 각자의 책 속으로 빠져든다. 지난 1월 말 서울과 대구·대전·부산 등지에서 시작된 이런 모임은 확산 일로다. 슬로 리딩에 대한 책도 이미 여러 권 출간됐다. 여행업계와 출판문화계도 휴대전화를 나무 금고에 넣고 독서에 열중할 수 있는 새로운 호텔 패키지 등을 속속 내놓고 있다. 파주 출판도시문화재단의 게스트 하우스인 ‘지지향(紙之鄕·종이의 고향이라는 뜻)’은 책에 몰입하면서 뇌에 휴식을 줄 수 있는 공간이다. 객실이 ‘이청준의 방’ ‘고은의 방’ 등 작가 이름을 따서 꾸며졌고, 작가의 친필 원고나 사진, 저서 등을 볼 수 있다. TV 대신 다양한 책을 비치했다.

미국의 일부 호텔은 고객이 투숙 기간 중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를 금고에 보관할 경우, 객실료의 15%를 깎아준다. 조용히 고전만 읽을 수 있는 ‘디톡스 객실’도 있다. 성균관대 문헌정보학과 학생회가 지난 5월 31일 ‘캠퍼스로 떠나는 성균인 책 소풍’ 행사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책을 읽기 전에 스마트폰을 주최 측에 맡겼다. 한국 경제 핵심 산업의 미래가 불투명해지면서 창조적 상상력을 높이기 위한 독서의 역할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몇몇 지역 사회와 대학 등에서 시도하고 있는 ‘묵독 파티’의 풍경 속에서 그 희망이 움트고 있다. 물론 각자 독서의 취향이 다르고, 책의 종류에 따라 그 독서법도 다를 수 있다. 책도 일하듯 읽어야 하는 현대 사회에서, 가끔이라도 시간을 내서 슬로 리딩을 시도해본다면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