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이혁(오른쪽)·최용훈 소장이 지난 8일 스튜디오 OL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들은 “‘남자의 공간’은 일보다 취미생활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사방에 도면이 가득하고, 구겨버린 설계 초안이 굴러다닌다. 책상 위엔 제도용 연필과 자, 벽면엔 현장 답사 사진이 붙어 있겠지. 상상 속 건축 사무소란 그런 것에 가까웠다. 감각적이지만 치열한 고민의 흔적들을 볼 거라는 기대. 예상은 빗나갔다.

지난 8일 방문한 서울 청담동 스튜디오 OL은 놀이터에 가까웠다. 매일 입는 점퍼처럼 대충 걸려있는 바이크 슈트, 인테리어 책 대신 책장을 점령한 헬멧, 그리고 1980년대 사진관에서나 볼 법한 아르카 스위스 필름 카메라. 책꽂이 한쪽은 와인 차지다. 이 공간의 주인은 이혁(45)·최용훈(41) 소장이다. “남자의 공간은 일이 아닌 취미생활을 위한 곳이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지론. 집중과 창조의 즐거움을 누리는 ‘소우주’를 만드는 이·최 소장에게 ‘취미생활’과 ‘남자의 공간’에 대해 물었다.

◇“공간을 확보한다는 건 자신을 잘 안다는 것” = “영역을 만드는 일이잖아요. 자신을 표시하는 거죠. 수컷의 본능이라고 해야 할까. 그게 회사든, 집이든, 또 어디든지. ‘남자의 공간’은 두 평짜리 골방이 될 수도 있고, 회사의 한쪽 벽면일 수도 있고, 수집품을 모아둔 책상 위 귀퉁이 일수도 있죠. 그렇게 영역을 만들다 보면, 자신을 더 잘 알게 되요.”(이)

이 소장의 ‘공간론’에 따르면 최근 MBC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자신의 집에 만들어 놓은 ‘전현무 박물관’을 소개한 전현무는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다. 여성들은 주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활용해 일상의 기록을 남기지만, 남성들은 자신만의 독립된 공간 보유를 선호한다. 그 안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을 하고 기록을 남긴다. 이 소장이 1999년에 구입한 아르카 스위스 필름 카메라를 집이 아닌 사무실에 보관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여가생활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일하고 남는 시간이라면 중요도에서 밀리죠. 취미생활이 본업이 돼야 해요.”(이)

최 소장은 ‘남자의 공간’을 일과 취미의 구분이 없는 곳이라고 정의 내렸다. 밥 먹고 자고 하는 자연스러운 일상처럼 두 가지 모두 삶 속에 녹아들어야 한다는 것. 그는 바이크 헬멧 5개가 자리한 책장을 가리키며 “일하는 공간을 자연스럽게 차지하게 되는 게 진정한 의미의 취미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최 소장의 책상 주변은 온통 취미생활을 위한 공간으로 보였다. 트렌치코트가 걸렸을 법한 옷걸이엔 바이크 슈트와 주짓수 유니폼이 걸려있다. 뒤편 책장에는 와인과 글라스, 음악 CD가 가득하다. “음악을 듣다 보니 취향을 알겠더라고요. 전 최신유행은 안 들어요. 클래식, 가요, 팝 등 장르는 다양한데 소위 ‘지나간 것’만 찾아 듣더라고요.”(최)

◇“한국 남자, 자신만의 공간이 너무 없어요” = 취미는 취향이 반영된 결과다. 혹은 취향을 찾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두 건축가가 지향하는 ‘남자의 공간’은 바로 이 두 가지로 꽉 들어찬 그런 공간이다. 그런데, “한국 남자, 공간이 없어도 너무 없어요”라고 입을 모은다. “미국에선 차고라도 남자 공간인데, 한국에선 온통 아이들 중심이잖아요. 서재도 아이가 크면 놀이방이 되고…. 그러면 점점 집에 들어가기 싫어지는 거죠, 하하”(최)

그래서 취미생활도 별로 즐기지 않고, 취향 파악도 어렵다. 여기저기 “먹고 사느라 여유가 없어서다”라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린다. “시간, 돈? 변명이죠. 저도 딸이 둘인데, 사무실은 이렇지만 집에선 정작 ‘영역’이 없어요. 그래서 확보한 건 베란다에요. 최근에 고수 씨를 뿌렸는데, 잘 자랐더라고요. 어제는 뜯어서 파스타를 해 먹었어요.(최) 이 소장의 ‘쇼핑하기’가 취향을 찾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최 소장의 베란다 점령은 어쩌면 공간 확보 입문 단계쯤 되겠다. 젊은 층 사이에서 늘고 있는 데스크테리어(일터의 책상을 취향에 맞게 꾸미는 것) 문화도 일종의 ‘남자의 공간’이 확장된 결과다.

두 사람은 최근 열린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서 남자의 취미를 위한 공간으로 ‘홈 아틀리에’를 제안하기도 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나만의 책’ 만들기를 좋아하는 남자의 취미생활 공간을 구현했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