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와 관계 좋으면 韓 따라와’
韓·日을 美·日종속변수로 봐

일본이 과거사 왜곡을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진전시키는 ‘살라미’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2월 한국을 말할 때 표현해온 “기본적 가치와 이익을 공유하는”이라는 대목을 제외한 이후 공공문서에서 기존의 한·일 관계 표현을 하나씩 하나씩 삭제해가고 있는 게 심상찮다. 중장기 플랜을 갖고 치밀한 시나리오를 차례로 전개하는 양상이다.

주미 일본대사관 홈페이지의 홍보 동영상에도 사죄·반성 문구가 사라졌다는 사실(문화일보 3월 24일자 1·3면 참조)이 24일 확인됐다.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되면 한·일 관계도 자연스럽게 좋아진다고 보는 아베 내각의 왜곡된 인식이 가장 큰 문제로, 일본이 한·일 관계를 미·일 관계의 종속변수로 보는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전후 일본의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은 미국 탓이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전문가들은 아베 내각이 펼치고 있는 ‘살라미’ 전술에 주목하고 있다. 2006∼2007년 1기 아베 내각은 ‘우경화’ 정책 집행에 실패하기는 했지만, 아베 총리는 실패를 발판 삼아 2012년 12월 2기 내각에서부터는 훨씬 체계화된 방식으로 역사 왜곡에 나서고 있다는 분석이다. 2013년 12월 아베 총리가 처음으로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참배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후 지난해 12월 출범한 3기 아베 내각에서는 노골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및 과거사 왜곡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는 아베 총리가 6년을 집권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 이후 최장수 총리가 됐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다. 아베 총리가 미·일 관계를 최우선시하고, 한·일 관계를 미·일 관계의 종속변수로 본다는 점에서 고이즈미 전 총리와도 ‘닮은꼴’이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재직 당시 “미·일 관계가 좋을수록 중국·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과 좋은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명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아베 총리가 ‘미국과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고이즈미 전 총리를 스승으로 삼은 듯하다”고 말했다.

일본의 이 같은 강자 중심 전략으로 인해 동북아 정세가 더 꼬이게 된 데에는 미국의 책임도 적지 않다. 태평양 전쟁 이후 미 군정이 일왕에게 면죄부를 주는 등 일본의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은 데다, 냉전 시대부터 동북아에서 일본을 전략적 교두보로 삼으면서 일본이 굳이 과거사 사죄·반성에 나설 이유가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일본의 아베 총리에게 4월 말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을 허용한 것도 패착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 연구위원은 “일본이 ‘미국과의 관계만 좋으면 한국과의 관계도 뒤따라온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은 제대로 역사 청산을 안 한 미국이 배후세력”이라고 말했다.

신보영·방승배 기자 boyoung22@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