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배우 박신혜가 SBS 수목드라마 ‘피노키오’ 촬영 도중 스태프의 도움을 받아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다.

“연말연시? 우린 몰라요.”

서울 상암으로 터를 옮긴 MBC에 들렀다가 오랜만에 만난 한 예능국 조연출은 이렇게 말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편집할 녹화 분량이 산더미 같다”는 말만 남긴 채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신 누르는 이 조연출은 유명 브랜드가 붙은 두툼한 파카를 입고 있었다.

외부 촬영과 밤샘 편집을 반복하는 그에게 실내와 실외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또한 한 해를 정리하는 연말과 또 다른 한 해를 시작하는 연시 역시 ‘2014’에서 ‘2015’로 숫자가 바뀌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해가 바뀌어도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약속된 방송을 내보내야 하는 그들에게 연말은 각종 시상식과 특집 프로그램으로 정신이 없는 ‘고난의 행군’일 뿐이다.

분야별로 따지자면 업무 강도가 가장 센 분야는 드라마다. 현재 수목극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는 SBS ‘피노키오’(극본 박혜련·연출 조수원)로 본다면 내년 1월 1일 15, 16회 연속 방송을 앞두고 두 회 분량을 동시에 촬영하고 있다. 스태프의 평균 수면 시간은 2∼3시간 정도. 배우들의 경우 자신의 촬영 분량이 없을 때 대기하면서 쪽잠을 청하기도 하지만 모든 촬영 장면에 동원되는 스태프는 풀(full) 가동이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쪽대본’이 없다는 점이다. 오랜 기간 ‘피노키오’를 준비한 박혜련 작가가 항상 제본된 대본을 전해 주기 때문에 A4 용지에 출력돼 오는 10줄짜리 쪽대본을 추위에 떨며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피노키오’의 제작 관계자는 “매주 목요일을 휴일로 정하고 최대한 지키려 노력하지만 워낙 스케줄이 빡빡해 제작진과 출연진 모두 잠을 쪼개가며 촬영하고 있다. 31일 연말 특집 프로그램 때문에 ‘피노키오’가 결방되지만 이튿날 두 회가 연속 방송되기 때문에 바쁜 건 마찬가지”라며 “우리나라의 드라마 제작 여건상 연말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시간에 쫓기며 촬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능 프로그램의 경우 포맷에 따라 노동 강도가 크게 달라진다. 실내 세트에서 녹화되는 프로그램의 제작진은 추위와의 싸움도 피할 수 있고 한 회 분량의 녹화 시간도 5시간 내외다. 하지만 야외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제작진의 노동 강도는 드라마 촬영 현장 못지않다. 장소 섭외를 시작으로 촬영 협조를 구하고 동선을 짜야 한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촬영해야 하는 분량이 있고 눈이나 비 때문에 촬영이 지연될 수 있기 때문에 날씨도 시간대별로 챙긴다. 노동 강도로만 따지자면 KBS 2TV ‘해피 선데이-1박2일’이 예능 최대 격전지로 불리는 일요일 저녁 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한 것은 당연하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면 진짜 싸움이 시작된다. 수십 대의 카메라에 가득 담긴 촬영 분량을 편집하는 작업이 남았다. 이때부터 조연출과 편집기의 씨름이 시작된다. 신년 1월 7일 처음 방송되는 KBS 2TV 새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투명인간’의 경우 6명의 출연진을 밀착 마크하는 카메라만 40대다. 권경일 KBS 책임프로듀서(CP)는 “카메라당 10시간 정도씩 촬영을 하기 때문에 총 400시간 분량을 보며 편집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예능의 꽃’이라 불리는 자막 작업이 남았다. 자막의 홍수라는 지적도 많지만 잘 쓴 자막 한 줄이 재미를 배가시키기 때문에 자막 쓰는 센스가 조연출의 능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권경일 CP는 “자막을 입히는 것은 예능의 가장 어려운 작업이자 중요한 작업”이라며 “1분 분량의 자막을 쓰는 데 1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덧붙였다.

PD들의 반쪽인 작가들의 업무 하중도 상상 이상이다. 특히 매일 1∼2시간가량 생방송을 소화해야 하는 라디오 작가들은 컴퓨터 앞을 떠날 새가 없다. 메인 작가는 육체 노동보다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크다. 큰 줄기와 방향을 잡아준 후 최종 검토하는 것이 주된 업무다. 하지만 서브나 막내 작가는 매일 족히 A4 용지 20페이지에 육박하는 원고를 작성해야 한다. 혈기왕성한 젊은 작가들은 연말연시에 ‘놀 사람’이 아니라 ‘놀 시간’이 없어서 못 논다.

맡은 프로그램 DJ의 성향에 따라 업무량이 달라지기도 한다. 미숙한 DJ는 조사 하나까지 완벽하게 구성된 대본을 쥐어 줘야 하는 반면 능숙한 DJ는 아이템만 정해지면 청산유수처럼 말을 이어간다. 후자의 경우 작가의 업무가 조금은 줄어들지만 이 역시 마냥 좋은 건 아니다. 라디오밥을 먹은 지 7년이 됐다는 김모 작가는 “베테랑 DJ와 일을 하면 작가의 역량을 발휘할 기회가 줄어들기도 한다. 써준 대본을 읽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을 때는 화도 난다”며 “이렇게 매일 대본만 쓰며 같은 사람들만 만나다 보니 결혼은커녕 연애할 시간도 없다”고 토로했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

이미지 크게보기 KBS 2TV ‘해피선데이-1박2일’의 유호진 PD가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