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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에 돈이 부족하지 않은데도 꼭 필요한 실물경제로 흘러가지 못하는 ‘돈맥경화’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경기진작을 위해 41조 원에 달하는 재정확대 정책을 추진하고 있고,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도 예고돼 자칫 시중에 돈은 넘쳐나는데 경기진작 정책효과는 거두지 못하는 ‘유동성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불거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유동성 확대 정책과 더불어 시중의 돈이 금융권을 넘어 실물경기로 원활하게 흐를 수 있도록 기업과 가계의 위축된 심리를 해소하는 대책이 병행돼야 경기진작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유동성 함정은 시중에 현금이 넘쳐나는데도 기업 투자나 가계 소비가 늘지 않아 경기가 나아지지 않고 마치 함정(trap)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11일 한국은행 등에 따르면 돈의 회전을 보여주는 통화승수는 지난 5월 현재 19.4배로 2001년 이후 최저치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소비 위축으로 예금을 빼가지 않으면서 지난 5월 예금회전율은 3.5회까지 급락했고, 기업들이 투자를 하지 않아 채권 발행액도 급감하고 있다. 통화승수 등은 최경환(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경제팀 출범 전의 지표여서 이후 개선됐을 수는 있지만 현재 한국경제의 돈맥경화 심각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5만 원권 회수율은 지난해 상반기 54.5%에서 올 상반기 28.1%로 반토막 났다. 기업에도 돈이 안 돌기는 마찬가지다. 대기업 대출은 지난 6월 1조4000억 원 감소했고, 올 상반기 채권 순발행 규모는 58조5000억 원으로 전년 동기(110조9000억 원) 대비 절반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윤창현 한국금융연구원장은 “돈이 꼭 필요한 곳에 가지 못하면서 유동성 함정이 나타날 수 있다”며 “돈이 원활하게 돌 수 있도록 과감한 규제개혁으로 기업 투자를 유도하고 극도로 위축된 기업·가계의 경제심리를 풀어주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식(경제학) 연세대 교수는 “돈맥경화의 원인은 결국 가계와 기업 모두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기 때문”이라며 “기업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규제혁파와 더불어 기업들이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정부가 산업육성책 등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정근 아시아금융학회장은 “기업은 투자를 하고 싶어도 마땅한 투자처를 찾기 힘들고, 개인은 가계부채 및 노후 불확실성 등으로 소비를 극도로 꺼리면서 현금을 보유한 채 돈이 돌지 않고 있다”며 “기업들의 위축된 경제심리를 해소해 쥐고 있는 돈이 잘 돌 수 있게 하려면 각종 규제를 완화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부문장은 “정부가 개인과 기업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어떻게 해소해주느냐가 관건인데, 최근 발표한 정부의 대규모 경기부양책과 함께 창조경제, 경제혁신 3개년계획 등의 경제활성화 정책이 잘 시행돼 선순환 고리가 형성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충남·장병철 기자 utopian21@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