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0일 화요일,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항.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항을 출발한 화물선 한 척이 4주간의 항해 끝에 도착했다. 거대한 회색빛 철제 드럼들에는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 문양의 삼엽기호(Tri-Foil Symbol·방사능 표시 국제기호) 표지가 부착됐다. 미국과 러시아 국기인 성조기와 플라그로시 사이에 ‘2만 개의 핵탄두가 제거되다’라고 적힌 포스터도 붙었다. 하지만 군악대의 팡파르도, 성대한 축하행사도 없었다. 대중들에게 알려지지도 않았고, 이날 미국 유명 전국 매체들도 기사로 다루지는 않았다. 지역 신문인 볼티모어 선만 비즈니스면에 ‘러시아 핵탄두에서 핵연료로’라는 제목으로 짧게 소식을 전했다.

미국과 러시아가 체결한 ‘핵탄두 핵연료 전환(메가톤 투 메가와트·Megatons to Megawatts)’ 프로그램이 지난 3월 말 마지막 잔금 정산이 이뤄지면서 완전 종료됐다. 메가톤 투 메가와트 프로그램은 인류 역사에서 재앙의 무기인 핵탄두를 원자력발전을 위한 핵연료로 바꾼 기념비적인 사업이다. 지난 20년 동안 러시아는 구소련의 핵무기에서 추출한 90%의 고농축우라늄(HEU)235를 미국에 판매했고, 미국은 고농축우라늄을 5%의 저농축우라늄(LEU)235로 희석시켜 원자력발전소에 핵연료로 공급했다. 수입과 판매를 담당했던 미국우라늄농축공사(USEC)의 홈페이지에는 프로그램 비용이 80억 달러(약 8조2872억 원)로 언급됐지만, 뉴욕타임스(NYT)는 러시아가 실제로는 170억 달러(17조6103억 원)를 받았다고 전했다.

메가톤 투 메가와트 프로그램은 한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이름은 토머스 네프, ‘핵군축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올해 일흔 살의 핵전문가다. 스탠퍼드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매사추세츠공과대(MIT) 수석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성품 탓인지 핵탄두를 핵연료로 질량 전환시킨 엄청난 업적을 이뤘어도 대중들에게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주미러시아대사관은 지난해 12월 말 네프 박사를 초청해 간소한 메가톤 투 메가와트 프로그램 종료 기념식을 열었다.

1991년 구소련 붕괴 과정에서 미국은 고민에 빠졌다. 냉전의 산물인 구소련의 핵탄두는 미국에 엄청난 골칫거리였다. 미국과학자협회(FAS)에 따르면 구소련은 1만1000여 개의 전략 핵무기를 포함해 2만7000여 개 이상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었다. 사실상 재정 파탄 상태나 다름없었던 구소련은 핵무기를 관리할 능력도 의지도 많지 않았다. 백악관은 핵탄두가 테러리스트들의 손에 들어갈 경우 뉴욕의 맨해튼과 워싱턴의 캐피털 힐에서 언제 버섯구름이 피어오를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그때 네프 박사가 나타났다. 작가 톰 클랜시는 1991년 베스트셀러인 ‘모든 공포의 총합(The Sum of All Fears)’에서 도난당한 핵무기가 슈퍼볼 경기장에서 폭발한다는 얘기를 다뤘다. 핵과학자들 사이에서도 구소련의 핵무기에 대한 우려가 컸다.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IC)에는 국제테러단체인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핵무기를 구매하기 위해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중앙아시아 3개국 지역에 드나들고 있다는 첩보가 수시로 들어왔다. 마음먹고 담장 하나만 넘으면 언제든지 핵무기를 탈취할 수 있을 정도로 관리도 허술했다. 정부로부터 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던 핵무기 관리요원에게 돈을 건네고 핵물질을 구입하는 일도 가능했다.

구소련 붕괴를 2개월 정도 앞둔 1991년 10월 19일. 워싱턴DC의 스테이트 플라자 호텔에서는 군축 비정부기구(NGO) 세미나가 열렸다. 네프 박사는 구소련의 핵무기 시설 책임자인 빅터 미하일로프에게 다가갔다. 네프 박사는 “핵탄두의 우라늄을 판매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미하일로프는 “흥미 있는데, 얼마나 원하는가”라고 반문했다. 네프 박사는 “500메트릭t(1000㎏을 1t으로 하는 중량 단위)”이라고 답했다. 네프 박사가 제안한 500메트릭t은 747 점보제트기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 양이었다.

닷새 뒤인 10월 24일 네프 박사는 NYT에 ‘그랜드 우라늄 바겐(A Grand Uranium Bargain)’이라는 제목으로 기고문을 게재했다. 그는 “전형적인 핵탄두 한 개가 20만 달러 핵연료의 가치가 있다고 보면, 핵탄두 1만 개에 있는 200메트릭t의 HEU는 20억 달러 정도가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네프 박사는 “핵탄두의 우라늄을 상업용 원자력발전소의 핵연료로 쓸 수 있다”며 “미국이 핵물질을 얻지 못한다면 무기 단계의 핵물질이 최고 가격을 제시한 입찰자에게 흘러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단순한 핵물질 거래를 넘어서 국제적 비핵확산 체제 수립에서부터 핵군축 협상 전개의 필요성 등도 역설했다. 네프 박사의 기고문 내용은 현재 미국 핵군축과 비핵확산 정책 궤도와 같은 선상에 있다.

백악관과 크렘린은 네프 박사의 아이디어를 환영했다. 구소련을 승계한 러시아는 1995년 첫 번째 핵탄두 우라늄 선적분을 미국에 보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마지막 화물이 도착했고, 대금 정산도 끝났다. 그는 러시아와 다른 구소련 공화국들을 20여 차례 오가면서 메가톤 투 메가와트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지난 20년 동안 구소련의 2만여 개 핵탄두에서 추출된 500메트릭t의 HEU는 1만5432메트릭t의 LEU로 희석됐다. 핵연료는 2년 동안 미국의 2만 개 도시, 1억1500만 가구에서 쓸 수 있는 전기를 생산했다. 핵재앙의 검은 구름을 뚫고 지구에도 환한 빛을 비춰줬다.

워싱턴=이제교 특파원 jk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