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우리의 전통 식생활에서 견과류는 세시풍속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정월 대보름 아침이면 치아를 단단하게 하라는 기원으로 호두로 부럼깨물기를 했고, 정월 대보름 저녁에는 잣을 바늘에 꿰어 불을 붙여 활활 타는 불꽃을 보면서 한 해의 소원을 비는 잣불켜기를 했다. 잣, 호두 등의 견과류는 세시음식으로뿐만 아니라 찜, 신선로 등에 고명은 물론 강정, 전과, 약식 등의 식재료로도 사용돼 왔다.

봉수탕(鳳髓湯)은 그 같은 견과류를 이용한 궁중 차다. 봉수탕은 잣과 속껍질을 벗겨낸 호두를 곱게 다져서 꿀에 재워 백비탕(白沸湯·아무것도 넣지 않고 맹탕으로 끓인 물)에 타서 마시는 음료이다. 봉수탕은 식후에 마시면 폐를 좋게 하여 천식과 해수를 치료하고, 대소변을 통하게 하며 요통을 치료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 실학자 홍만선의 산림경제에는 봉수탕에 대해 “독이 없고 먹으면 머리털이 검어지고 강장 및 강정 효과가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봉수탕 만드는 법은 매우 간단하다. 잣은 고깔을 떼어 놓고, 호두는 뜨거운 물에 불려서 속껍질을 벗긴다. 한지를 깔고 잣과 호두를 아주 곱게 다진다. 꿀을 넣고 고루 섞어서 단지에 재워 두었다가 먹을 때는 꿀에 재워 둔 잣과 호두의 혼합물을 2큰술 정도 찻잔에 넣고 끓는 물을 붓는다. 탕의 농도는 기호에 따라 조절하면 된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잣, 호두 등을 활용한 음식이 우리의 식생활 풍속에서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최근 들어 견과류의 영양적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잣, 호두, 땅콩, 아몬드, 은행 등을 하루에 25g 정도(150㎉) 섭취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 음료인 봉수탕은 바쁜 현대인들에게 든든한 한 잔의 영양식이 될 수 있다. 맛도 고소해 식사 대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래서 최근에 날로 증가하는 커피전문점에서는 호두, 잣, 밤 등을 갈아 넣은 차 등이 많이 팔리고 있다.

300년 전 우리 음식에서 이용됐던 봉수탕이 현대인의 식생활에서 건강식으로 재탄생된 듯하다. 점차 따뜻해지는 봄날에 고궁의 뜰에서 잣과 호두를 갈아 꿀물에 타서 마시면서 춘곤증을 멀리하고 봄을 만끽해 보는 건 어떨까. 한편 잣, 호두 등의 기름 성분에는 산패성이 있으므로 한 번에 너무 많이 먹거나 오래 두고 먹지 않아야 한다.

공주대 명예교수·전 한국가정과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