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지난 1947년 1월 1일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써온 우건석 씨가 3일 충북 충주시 자신의 서재에서 예전 일기장을 들고 일기 쓰기의 즐거움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충주 = 정하종 기자 maloo@munhwa.com

“일기는 내가 살아온 인생의 복사판이자 동반자입니다.” 68년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써오며 사는 80대가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온천리에 사는 우건석(86) 씨. 그가 쓴 일기장은 좀이 슬어 너덜너덜해진 누런 갱지에 쓴 첫 번째 것부터 다이어리 모양의 최신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63권으로 라면상자 3개 분량에 이른다. 이 일기장은 우 씨의 ‘재산목록 1호’로 인생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난 3일 우 씨의 자택 서재에 들어서자 책장 한쪽에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손때가 묻은 일기장이 빼곡했다. 이 일기장은 지난 67년여 평생에 걸쳐 매일 기록한 인생 역정을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연도별로 가지런히 정돈돼 있었다.

1928년 농부의 6남 3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난 우 씨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세가 되던 1947년 1월 1일부터. 일제강점기 시절 수안보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2년여 동안 중학교를 다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해 고향집에서 1년여의 세월을 보낸 뒤 ‘대학교수가 되자’는 의지를 키우기 위해 새해를 맞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매일 일기를 쓰다 보니 그는 자신도 모르게 1개월도 되지 않아 대학교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학업을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러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낮에는 종로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사환으로 일하고 밤에는 서울역 근처 야간 중학교(당시 조양중학교)에 다니는 외롭고 힘든 타지생활 속에서도 그는 저녁 늦게 자취방으로 돌아와 갱지에 하루의 생활과 소감 등을 연필로 또박또박 적는 것을 거르지 않았다.

3년간의 고학생 시절을 거쳐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1950년 고교과정에 해당하는 홍익대 국문과 전문부에 입학했으나 1학기를 마치기도 전에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우 씨는 금방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생각에 일기장 3권을 자취방에 보관하고 충주로 피란길에 올랐다. 피란길에서도 머문 장소와 시간, 밥을 얻어먹은 곳 등을 메모지에 빼곡하게 적었다. 전쟁이 끝나면 메모지에 기록했던 것을 다시 일기장에 옮겨 놓을 심산이었다.

하지만 고향집을 5㎞ 정도 남겨둔 충주시 살미면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인민군에게 붙잡혔다. 몸 수색과정에서 주머니에 넣어뒀던 메모지가 나오면서 그는 간첩으로 오인 받아 6시간 동안 권총을 들이대며 위협하는 심문을 받은 뒤 풀려났다. 일기를 쓰기 위한 메모습관이 오히려 자신을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한 셈이었다. 특히 휴전 후 서울 자취방으로 일기장을 찾으러 갔지만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때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우 씨는 “서울 자취방에서 쓴 일기장을 잃어버렸을 때는 나의 인생에서 3년여의 세월이 없어진 것처럼 허무하고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휴전 후 고향에 정착한 그는 수안보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2년간 근무하고 7년간 양잠 협동조합장을 맡아 일하면서도 일기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또 과수원에서 사과를 재배하는 등 농민이 된 뒤에는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과일·채소·농작물 등을 보며 느낀 소감과 새로 습득한 농법을 일기장에 자세하게 기록했다. 특히 10여 년 전 위암과 담석증 등으로 2차례 입원해 수술을 받았을 때도 병상에 누워 일기를 쓰는 등 하루라도 그날의 일과를 기록하지 않고는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습관이 됐다. 우 씨는 “일기를 쓰기 싫은 날도 종종 있었지만 한 번 안 쓰면 앞으로 영원히 쓰지 못할 것 같은 느낌에 펜을 놓을 수가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의 일기에는 날씨 외에도 집안 대소사는 물론 이웃들의 경조사와 지역 행사 등이 꼼꼼히 적혀 있다. 요즘에는 노인의 무료한 일상생활이 일기의 주요 소재가 되고 있다. 새해 첫날인 지난달 1일 일기에서 우 씨는 “새해에는 생활의 변혁을 가지고 좀 더 활발한 생활을 할 각오다”라고 의지를 다졌다. 또 13일에는 “세월 따라 청춘도 인생도 저물어 가고 오늘도 누워서 TV와 더불어 보냈다”며 인생무상의 감정을 기록했다.

우 씨의 일기에는 내용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이 배어 있다. 생각나는 대로 수시로 쓰며 짧게는 3분, 길어야 30분을 넘지 않는다. 또 내용도 짧은 것은 2∼3줄에 불과하고 길게 쓴 것은 한쪽을 빼곡하게 채운다.

60여 년간 일기장을 손에서 놓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글솜씨도 늘어 그는 80대의 늦은 나이인 지난 2009년 11월 호롱불과 등잔을 소재로 한 수필 ‘가보’로 월간 문학저널 신인문학상에 당선됐다. 2011년 1월에는 충주시 칠금동에 있는 명승지인 탄금대를 소재로 한 수필 ‘탄금대 기행’으로 청산문학 신인상을 받기도 했다. 지난해 여름에는 67년째 일기를 쓰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뒤 국가기록원에서 영구 보존해 주겠다며 기증을 요청했으나 우 씨는 일기 쓰기가 끝나지 않았다며 사후에 넘겨줄 것을 약속했다.

그는 또 지난해 말 충주시판 기네스인 ‘충주최고’에 일기왕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우 씨는 “원하던 국문과 교수는 못 됐지만 평생을 기록한 일기를 남기게 돼 일기장을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롭고 자랑스럽다”면서 “국내에서 최장기간 일기를 쓴 사람으로 기억되도록 죽을 때까지 일기 쓰기를 멈추지 않겠다”고 말했다.

한편 그의 기록습관에 영향을 받은 막냇동생 우건도(65) 전 충주시장도 1992년부터 23년째 일기를 쓰고 있다. 우 전 시장은 충북도청과 음성군·충주시 등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수년씩 도·군·시정 일지를 쓴 뒤 기증해 관공서의 일지 쓰기 제도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충주 = 고광일 기자 kik@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