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지난 14일 지역민들과 함께 예산으로 온천관광을 왔다가 덕숭산을 찾았다는 ‘군산대간산악회’의 등반대장 김중수(56·왼쪽) 씨가 정상 9분 능선 바위길을 오르고 있다. 아래쪽으로 수덕사 일부가 보이고 멀리 금북정맥의 끝자락 산군과 서해안이 눈에 들어온다. 예산 = 곽성호 기자 tray92@munhwa.com

엄홍길(54·밀레 기술고문) 대장은 지난해 남미 안데스산맥 8000㎞ 대장정을 마친 후 “‘수직(垂直)등정’에서 ‘수평(水平)산행’으로의 전환점이 됐다”면서 “수평산행은 히말라야 8000m급 고봉에 도전했을 때와는 또 다른 형태의 인내(忍耐)가 필요했을 뿐 아니라 그 과정 또한 달랐다”고 설명했다. 그는 “높은 산만이 ‘명산’이 아니듯, 산행 역시 높이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면서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 그 산의 가치는 물론 산행의 의미도 달라질 것이다”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그가 ‘몰입의 겨울산’으로 추천한 곳이 충남 예산군의 덕숭산(德崇山·495.2m)이다.

엄 대장은 “산악인들이 꼽는 전국의 ‘100대 명산’ 가운데 비교적 낮은 편에 속하지만 ‘높이 대신 깊이’를 음미할 수 있는 산”으로 덕숭산을 소개했다.

산 좀 다녔다는 등산 애호가들도 ‘덕숭산’ 하면 ‘어디 있는데?’라고 되묻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수덕사가 있는 산’이라고 하면 금세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수덕사로 이름과 존재감을 알린 덕에 ‘수덕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덕숭산은 항상 수덕사와 함께 소개된다. 덕숭산과 수덕사에는 이름에 얽힌 설화가 있다. 옛날 이곳 마을에 살았던 수덕 도령과 덕숭 낭자의 사랑에 얽힌 전설이다. 수덕이 어느 날 사냥을 갔다 덕숭이란 낭자를 보고 반해 청혼했지만 여러 번 거절당했다. 덕숭은 자기 집 근처에 절을 지어 달라는 조건으로 청혼을 승낙한다. 수덕은 절을 지었으나 낭자에 대한 연모 때문에 완성하는 순간 불이 나 전소됐다. 목욕재계하고 다시 절을 지었지만 역시 불에 탔다. 세 번째는 부처만 생각하고 절을 지어 결혼에 성공했다. 하지만 수덕이 덕숭을 끌어안는 순간 덕숭은 사라졌고, 그의 버선만 손에 들려 있었다. 그 자리는 바위로 변했다. 덕숭은 관음보살의 화신이었으며 이후 수덕사는 수덕 도령의 이름을 따고, 산은 덕숭산으로 이름 붙였다는 얘기다.

덕숭산은 한반도 13개 정맥 중 ‘한남금북정맥’에 속한다. 속리산 천왕봉에서 충북을 지나 경기 안성 칠장산에 이른 한남금북정맥은 다시 ‘한남’과 ‘금북’으로 갈라진다. 칠장산에서 북서쪽 경기도로 올라가면 한남정맥이고, 남서쪽 충남 땅으로 흐른 산줄기는 금북정맥이다.

덕숭산은 요즘은 육송이 많이 커서 잘 보이지 않지만 기암괴석이 많아 ‘호서(湖西)의 금강산’으로 불렸을 정도다. 덕숭산만 떼어 놓고 볼 때는 ‘수덕사 뒷산’ 정도로 조그마하고 밋밋하지만 예사롭지 않은 산이다. 정맥을 잇고 있는 산과 그곳에 자리한 절에 얽힌 깊은 얘기가 많은 탓일 게다.

덕숭산 산행 코스는 두 가지다. 수덕사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와 둔리 1구를 기점으로 종주하는 코스가 있다. 둘 모두 2시간 30여 분이면 산행을 마칠 수 있다.

지난 14일 산행의 출발지도 수덕사였다. 주차장을 지나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일주문. 왼편 초가로 된 ‘수덕여관’은 고암(顧庵) 이응로(1904∼1989) 화백이 살던 곳이다. 고암은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이곳에서 잠시 머물렀다. 이때 그는 여관 앞 바위에 암각화를 그렸는데,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화’가 대부분이다.

일주문-금강문-사천왕문을 넘어 황하정루박물관까지 지나서야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시대의 사찰인 수덕사의 본당이 나온다. 등산로는 범종각을 끼고 뒤편으로 이어진다. 수덕사 대웅전에서 정혜사까지 1080개 계단이 놓여 있다고 한다. 오르면서 열 번은 ‘백팔번뇌’를 하는 셈이다. 취재팀도 계단수를 세며 올랐으나 108번을 다섯 번쯤 돌았을 때쯤부턴가 세는 것을 잊어버렸다. 10여 분의 덕숭산행만으로 백팔번뇌에서 벗어난 걸까.

돌계단을 오르다 보니 ‘사면석불’이 나온다. 잠시 후 길은 다시 갈라지고 왼쪽으로 오르면 비구니들의 선방이자 한말 ‘신여성 1호’로 불렸던 일엽 스님이 수도했다는 견성암(見性庵)이 나온다. 일엽 스님은 춘원 이광수를 비롯해 숱한 남성들과의 로맨스로 유명했다. 일엽 스님이 속세의 연을 끊고 수덕사에 들었다는 것에 영감을 얻었는지, 당시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라는 가사의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대중가요 때문에 불교계의 반발이 일기도 했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송춘희는 노래가 히트하는 동안 한 번도 수덕사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는 얘기도 전해졌다. 수덕사를 ‘실연한 여인의 도피처’로 묘사하고 수도도량을 너무 세속화시켰다는 교계의 반발 때문이었다. 당시 일엽 스님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품으며 다시 잊어버렸던 계단수를 세어 본다.

견성암 쪽이 아닌 곧바로 난 계단으로 10여 분 오르니 초가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만공(1883∼1946) 스님이 참선을 위해 거처하던 소림초당이다. 만공 스님은 ‘텅빈 충만’이라는 호답게 숱한 기행과 일탈을 일삼았다. 거문고를 즐겨 탔고 서울 부민관에 최승희 춤구경을 갈 정도로 풍류를 알았다고 한다. 만해 한용운을 ‘애인’이라고 부르며 아꼈고 기방(妓房) 출입에도 거침이 없었다고 한다. 동안거의 소림초당에는 또 어떤 스님이 ‘면벽’을 하고 있는지, ‘정진 중, 출입금지’라는 표지판이 초당 앞 다리에 놓여 있다. 초당 위로는 만공 스님이 세웠다는 7.5m의 거대한 미륵불입상이 있다. 옆쪽 향운각 앞에 서면 지금까지 올라온 계단과 수덕사 전경이 함께 내려다보인다. 만공탑 왼편 길을 따라 100m 정도 올라가면 스님들의 참선도량인 정혜사가 자리하고 있다. 정혜사 앞마당은 덕숭산 최고의 조망처로 꼽힌다. 그러나 동안거에는 출입이 금지돼 있다.

정혜사 오른쪽 옛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조금씩 덕숭산 아래 조망이 열린다. 건너편으로 홍성의 용봉산, 수암산이 회색 승복을 입은 모습으로 다가선다. 눈과 나무의 색깔이 혼합됐기 때문이다.

정상에 오르면 가야산과 예당평야 등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안면도와 천수만도 보인다. 덕숭산은 주변에 육산들을 거느려 마치 꽃잎으로 둘러싸인 꽃술처럼 보인다. 바위산이 오롯이 솟아 있는 형상이다. 작아도 다부져 보이는 금북정맥의 등줄기인 것이다. 하산은 왔던 길을 되짚어 수덕사로 내려서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른 길을 원한다면 정상에서 동남쪽인 용봉산 방향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내려설 수도 있다. 전월사라는 자그마한 암자를 거쳐 정혜사로 이어지는 길이다. 거리는 조금 멀지만 바위가 별로 없고 폭신한 흙길이라 걷기에 부담 없어 좋다.

정혜사 인근에 비구니 스님들이 가꾸는 듯한 꽤 널찍한 텃밭이 있다. 스프링클러까지 설치돼 있다. 스님들도 현대식 영농을 하는 모양이다. 조그만 비닐하우스에서는 겨울 푸성귀가 자라고 있다. 소담하지만 깊이 있고 넉넉했던 덕숭산행과 닮은 장면이었다. 정혜사에 이르러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게 싫다면 견성암을 거쳐 황하정루로 이어지는 임도를 따른다. 시멘트포장길이라 산길의 맛은 없지만 중턱에서 수덕사를 조망할 수 있다. 덕숭산은 전체가 수덕사의 도량과 같았다. 산행은 차분한 느낌이 나고 많은 생각을 낳게 하는 수도였다.

예산 = 박광재 기자 kj59@munhwa.com

이미지 크게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