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국내의 대표적인 행동파 시장경제론자인 김종석 홍익대 경영대학 학장이 지난 18일 집무실에서 기자와 만나 저성장 극복을 위한 정책 대안을 설명하고 있다. 김연수 선임기자 nyskim@munhwa.com

지난 18일 늦은 오후에 찾은 서울 홍익대 교정 모습은 ‘철 지난 해수욕장’을 떠올리게 했다. 연둣빛 물이 금세 뚝뚝 떨어질 것만 같던 젊은이들이 방학을 맞아 썰물처럼 사라져 버린 교정에는 찬바람만 남아 이곳저곳을 거닐고 있었다. 존재감을 잃고 온기를 잃은 채 교정 위에 힘겹게 떠 있는 겨울 태양은 ‘한국 경제’를 연상시켰다. 최근 대졸 신입사원 공채를 역대 최저 수준으로 줄인 대형마트·프랜차이즈 업계의 현실을 보도하면서, 한국 경제의 성장을 견인해야 할 기대주인 서비스산업마저 ‘규제의 덫’에 걸려 저고용 산업으로 전락하는 기로에 서 있다는 아우성들을 들어야 했다.(문화일보 12월 9일자 1·4면 참조) 철 지난 해수욕장처럼 한국 경제가 더 이상 젊은 세대를 위한 일자리를 만들지 못하는 ‘불임 상태’에 빠져 드는 게 아닌가 하는 위기감까지 들었다. 인파가 몰리고 시장이 생기고 일자리가 늘어나던 여름철 해변의 역동적인 풍경을 과연 다시 볼 수 있을까.

맥킨지는 올해 내놓은 ‘제2차 한국보고서’와 ‘멈춰버린 한강의 기적’이라는 언론 기고를 통해 한국 경제에 대해 충격적인 진단을 내렸다. 사교육비와 가계 부채에 짓눌려 중산층이 붕괴되고, 대기업 공장의 해외 이전으로 ‘고용 없는 성장’이 심화되고 있다는 내용이다. ‘지금 한국 경제는 뜨거워지는 물 속의 개구리와 같다’, ‘북한 핵보다 경제 성장이 멈춰버린 게 한국의 진짜 위기다’ 등과 같은 섬뜩한 경고도 했다.

발걸음은 어느새 김종석(경제학) 경영대학 학장 사무실 문 앞에 멈춰 있었다. 김 학장은 지난 2007년 4월부터 2009년 5월까지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경제연구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 원장을 거치는 등 대표적인 시장경제론자이자 경제정책 및 규제 전문가로 꼽힌다. 그에게 정말 한국 경제의 건강 상태가 심각한지를 물었다.

―맥킨지의 진단에 공감하십니까.

“일각에서는 공포 담론을 팔아 장사를 한다고 얘기하지만 정확한 지적입니다. 어제오늘 만들어진 게 아니라 지난 10여 년간 추세적으로 형성된 한국병이죠. 한국 경제가 서서히 허약해지는 사실을, 자각 증상이 없다고 모르고 있는 것이죠. 제가 이런저런 자리에서 강연할 때마다 대한민국의 성장 잠재력이 2000년대 들어 계속 떨어지고 있고, 앞으로 10년이나 20년 내에 1% 미만, 사실상 제로로 간다고 얘기한 지가 벌써 10년도 더 됐습니다. 노무현정부 시절부터 잠재성장률이 떨어지는 그래프를 그리면서 강의했었어요.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더라고요. 대한민국의 성장 잠재력이 죽어가고 있다고 문화일보에 기고도 했죠.”

환하게 웃으면서 맞아준 김 학장의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 분명한 어조로 핵심만 짚어가면서 말을 이어갔다.

―처방전은 물론 있겠죠.

“성장 잠재력을 어떻게 올릴 수 있는지, 경제학에는 이미 해답이 나와 있어요. 이론적, 실증적 사례가 바로 대한민국 경제 발전 과정 아닌가요. 1970∼80년대 한국 경제 성장 모델은 전 세계 후진국이 배우고 싶어했던 한류 원조였어요. 투자 많이 하고, 기술개발 열심히 하고, 일자리 많이 만들고,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해서 경제활동 참가율을 높이고, 자원을 생산적인 곳으로 이동시켜 소위 총요소생산성을 올리면 잠재성장률은 올라가게 돼있어요.”

―그런데 왜 한국 경제가 병에 걸렸다고 보세요.

“2000년대 들어 이 같은 변수들에 문제가 생겨 한국 경제가 서서히 식어간 겁니다. 기업들이 투자 안하고 해외로 빠져 나가고, 고령화 저출산 현상이 심화되면서 경제활동 참가율도 내려가고 총요소생산성에서 생산성 향상이 차지하는 비중도 자꾸 떨어져요. 요소 투입이 안 늘어나고 생산성 떨어지니까 나라 경제가 서서히 시들어가는 것이죠. 알면서 못하는 겁니다. 정답은 나와 있는데….”

―처방전을 안 따르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으로 보십니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오는 2030년까지 한국이 무성장 국가가 될 것이라는 보고서를 지난해에 냈어요. 우리나라 민간 연구소에서도 지금부터 6∼10년 이내에 한국 경제가 사실상 성장 잠재력이 0에 수렴하는 일본식 장기 불황에 빠진다는 예측을 드러내놓고 하고 있고요. 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지금 한국 경제가 당면하고 있는 모든 경제문제의 뿌리인 저성장 위험이 암세포처럼 퍼질 겁니다. 국가부채, 재정적자, 일자리 감소, 양극화… 등, 이게 다 모든 문제의 뿌리인 저성장에서 나오는 거예요. 성장만 올라가면 증세 없는 복지재원 마련도 가능하고, 청년실업 없는 일자리 창출도 가능해요. 가계부채도 해결되고요. 모든 문제의 근원은 저성장입니다.”

―요즘은 ‘성장론’을 얘기하면 친기업적이고, 낡은 코드라고 비판받는데요.

“지금 우리나라 여론 형성 과정에 경제 전문가를 자임하면서 묘방과 왕도가 있는 듯이 혹세무민하는 사람들이 나와 국민들로 하여금 잘못된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입니다. 비유하자면 의학계에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선 담배는 끊고, 체중 조절해야 하고, 운동 열심히 해야 한다고 권고하지요. 그런데 의사라고 자처하는 어떤 사람이 나타나 담배 안 끊어도 오래 사는 사람 많고 운동 열심히 안 해도 장수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식이죠. 경제 전문가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으니 우리로선 걱정스럽습니다. 아니라고 얘기하면 당신은 신자유주의자, 시장주의자냐고 낙인을 찍어버려요. 국민들은 생활이 어렵고 팍팍해지니까 묘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 당신이 못사는 것은 잘사는 사람들 때문이고, 경제민주화를 하면 다 잘살게 되고 이런 식으로 얘기하니까 복음으로 들릴 듯도 해요. 하지만 우리 같은 주류 경제학자들이 보기엔 굉장히 불안한 것이죠.”

김 학장은 정말 답답한 현실이라면서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결정은 정치인들이 해줘야 하는데, 아무도 나서려는 사람이 없어요. 경제는 묘방이나 왕도가 없어요. 정도만 있죠. 이제 와서 성장 잠재력이 3.8%라느니, 3%도 안될 거라느니 난리를 피우잖아요. 문제는 이 병이 1∼2년 새 형성된 게 아니라 10년 넘게 추세적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되돌리는 데 그만큼의 시일이 걸린다는 겁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빨리 정부와 국민이 합심해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 효율적으로 생산해서 경쟁력을 높이고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을까 국가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근로시간 단축, 대체휴일제, 증세를 통한 재배분, 복지 문제와 같이 어떻게 하면 일 덜하고 더 나눠 먹을 수 있을까에만 관심이 있어요.”

―2014년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다시 경제민주화 바람이 불고 있는데.

“경제민주화는 우리 헌법에 있는 내용이고, 자체로선 훌륭한 개념이에요. 문제는 현실에서 정책화될 때 나쁜 경제민주화로 가는 게 문제예요. 나쁜 경제민주화의 다른 말이 바로 포퓰리즘, 인기영합주의죠. 우리가 지난 총선·대선에서 과잉 경제민주화의 부작용과 나쁜 점을 충분히 학습한 만큼 내년에 돌아오는 지방선거는 착한 경제민주화를 추구하는 지혜로운 선택을 했으면 좋겠어요. 착한 경제민주화를 하려면 경제권력의 집중화, 오남용 등을 막아 궁극적으로 소비자 선택과 복지를 높여야 합니다. 그게 착한 경제 민주화예요. 대형 강성 노조도 경제권력이고 특정 지역이나 사업자들의 집단이기주의도 경제권력입니다. 경제민주화를 하되 시장경제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착한 쪽으로 길을 잡아가자는 거지요.”

―일반 서민이 나쁜 경제민주화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을 좀 더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면.

“모든 경제활동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죠. 어떤 조치가 소비자의 권익과 선택, 편의, 삶의 질 등을 훼손하느냐 향상시키느냐로 판단하면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최근 전국철도노동조합 파업사태, 골목상권 보호, 재벌에 대한 투자 규제 등도 이 관점에서 파악하면 됩니다. 생산자 중심으로 흘러가니 기업 보호에 치중하고, 일자리 가진 사람 보호에만 치중하니 일자리 필요한 사람은 일자리가 안 생기고, 상권 보호에 치중하다 보니 소비자는 불편해지고, 원가는 올라가고. 국민소득은 올라가는데 삶의 질은 안 올라가는 것이죠.”

―박근혜정부의 경제정책 목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지금 박근혜정부는 성장이란 단어에 정치적 매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경제정책의 목표를 일자리로 바꿨어요. 경제정책 지표를 성장률이 아니라 실업률, 고용률로 하겠다 해서 70% 고용률 얘기를 꺼냈죠. 물론 바람직한 방향이나 자칫 일자리 지상주의의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목표 숫자에 집착하는 관료적 접근이 발생하고 있는 거죠. 즉 일자리를 무조건 만들기만 하면 된다는 일자리 지상주의에 빠졌어요. 이게 안타까워요.”

김 학장은 현 정부의 경제팀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럽다면서도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성장 없는 고용’의 그림자를 말씀하는 것이죠?

“일거리가 없어지는데 일자리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얘기죠. 청년고용 할당이나 근로시간 나눠서 사람을 메우는 것이나, 시간 선택제 근로를 의무화하라는 식의 고강도 규제로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시도는 득보다 실이 클 수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비용 상승 요인이 돼서 오히려 경제활력을 떨어뜨려 일자리를 줄이고 물가상승 요인이 될 수 있어요. 일자리 창출이 중요하지만 성장 없는 일자리 창출은 불가능합니다. 고용친화적인 성장전략이 사실은 정답이 아니었겠습니까. 지금 정부는 인수위원회 때부터 무조건 고용률 70%에 매달리는데 이것도 박 대통령 임기 후반에 정치적 부담을 지울 수 있는 숫자가 될 수 있어 걱정이에요. 이명박정부의 747(7% 경제성장률·4만 달러 국민소득·7대 경제대국) 공약이 조롱거리가 됐듯이 이것도 자칫 그렇게 될 수 있어요. 일자리는 일거리가 있어야 하고 일자리는 기업이 만든다는 기본적인 원리를 외면한 채 행정력으로 지시와 통제를 통해 목표를 달성하려 드니까 생기는 문제지요.”

―박근혜정부의 1년 경제정책을 평가하신다면.

“역대 정부가 항상 취임 1년을 전후해선 강력하게 각종 규제 개혁, 기업 개혁, 금융 개혁, 공공부문 개혁 등을 밀어붙였죠. 하지만 현 정부는 다른 현안이 있는지 몰라도 개혁을 위한 노력이 눈에 잘 안 띄어요. 공무원의 전문성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뜻을 위임받아 개혁하는 정책 어젠다를 제시하지 못하는 게 아쉬워요. 다만 지난해 양대 선거를 거치면서 몰아닥친 정치열풍, 정치과잉의 여진이 아직 있지만 정권 출범 후 들뜬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평상심으로 빨리 우리 사회를 돌아가게 한 건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현실적인 접근, 성장 잠재력·국가 경쟁력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도 높이 평가합니다.”

김 학장은 노련한 길잡이를 찾아 한국 경제가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제철 맞은 해수욕장’의 풍경을 다시 한국 경제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면서 낙엽이 날리는 창 밖의 교정으로 눈길을 돌렸다.

인터뷰=이관범 차장대우(경제산업부) frog72@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