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영토를 확장하면서 새로 편입된 지역에 봉건제와 중앙집권제인 군현제를 병행해서 실시했다. 고국천왕은 서기 194년 관곡을 대여하는 진대법을 실시했다. 일회성이 아닌 제도적인 빈민구제정책의 효시가 된 이 제도는 고구려에 수많은 백성이 유입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논이 없는 농민이 귀족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도 막았다. 이는 군현제를 공고하게 유지하기 위한 정책이기도 한 셈이다. 고국천왕의 신임을 얻은 명재상이자 명정치가인 을파소는 진대법을 비롯한 다양한 민생안정책과 경제개혁 정책을 시행했다.

최근 복지정책 논쟁이 가열되고 있는 가운데 진대법의 변천사를 비롯해 우리나라의 구제제도를 역사적·종합적으로 평가한 책이 최익한의 ‘조선사회정책사’(서해문집)다. 재해, 진휼, 환곡 등 사회정책을 다룬 국내 최초의 책이다. 1947년 간행된 이 책을 송찬섭(문화교양학) 한국방송통신대 교수가 새롭게 엮었다.

최익한은 책에서 “왕은 담당 관청에 명해 매년 3월부터 7월까지 관곡을 내어 백성의 가족 수에 따라 차등있게 대부했다가 10월에 선납하게 했다”며 “(우리나라 사회복지제도)의 신기원인 진대법은 고려의 의창과 이조의 환곡 및 사창(社倉)의 효시가 됐다”고 썼다.

책에 따르면 점필재 김종직의 아버지인 강호 김숙자는 세종 당시 흉년을 당해 굶주린 사람들이 하나둘씩 쓰러지자 군수물자를 풀어 구제대책을 마련했다. 은혜에 감동한 주민들은 추수 때가 되자 독촉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되갚았다. 그는 “(중국 전한 시대의 관리) 급암은 왕명을 거짓 칭하여 하남의 창고를 내어 빈민을 구한 뒤 죄를 사양치 않았다”고 말했다.

조선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적지 않은 비축곡을 가지고 있었고, 이 비축곡을 환곡과 진휼자금으로 썼다. 18세기 후반 조선왕조의 비축곡은 1000만 석으로 당대 중국의 1인당 비축곡과 비교할 때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최익한은 이 책에서 “이조의 환곡제도는 구제 유무를 불문하고 매년 지방 민호에게 강제로 배분해 대부했다”고 썼다. 결국 이는 백성들의 부담으로 돌아갔다.

조선 후기의 경세가인 다산 정약용은 사회경제학적 시각에서 환곡의 폐혜를 논했다.

“강제 대부와 강제 저축을 내용으로 하는 환곡제는 국가의 민간 곡물에 대한 일종의 간섭, 구속이므로 일방적으로는 인민 사유의 흥미를 깨뜨리고 일방으로는 재산의 자유처리를 방해한다고 했다. 이리하여 다산은 은연히 산업자유와 개인주의 방향을 지시, 동경했다.”(172쪽)

송찬섭 교수는 “‘조선사회정책사’는 우리나라의 구제제도를 평면적으로 열거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구제제도가 경제제도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혔다”며 “이는 조선의 구제제도에 근대의 복지 개념을 적용시킨 국내 최초의 사회복지학 저서”라고 말했다.

예진수 기자 jiny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