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산촌 화전민의 집 지붕으로 쓰이던 납작한 너와를 화판처럼 사용해 여성의 이미지를 표현한 윤석남 씨의 너와 작품들.

윤영주(가회헌 대표) 씨가 강원도 구룡령 산행길에 화전민들이 지붕을 일 때 기와처럼 쓰던 납작한 나뭇조각, 너와 더미를 만난 것은 1980년대 초반이었다. 그는 오지 산촌에 용도 폐기된 채 버려져 있던 너와를 지프 트렁크 분량만큼 얻어 서울 집으로 가져왔다. 너와는 서울서도 별다른 용도 없이 30년여간 창고 신세였다. 그러다 지난봄, 나무 작업하는 미술작가 윤석남 씨와의 인연을 계기로 너와는 30년 만에 그림의 화판으로 되살아났다.

‘나무의 작가’ 윤석남(74) 씨가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화랑에서 16일 개막하는 개인전을 통해 ‘너와 인물화’ 등을 선보인다.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란 제목으로 개인전을 여는 윤 씨는 “지난봄 우연히 건네받은 너와를 하나씩 닦아 보니 신기하게도 제각각의 얼굴이 드러났고 설레는 마음으로 감춰져 있던 얼굴을 되살려냈다”고 말한다.

그는 한 팔 길이 정도로 길쭉하고 납작한 너와에 검정색 아크릴물감으로 드로잉하듯 몇 개의 선으로 얼굴을 그렸다. 너와 작품 46점 중 단순화한 남성 얼굴이 등장하는 ‘끈’을 제외하고 45점이 여성의 얼굴이며 몸매다. 작가는 나뭇결에 따라 이목구비를 그려 넣거나, 목, 가슴과 팔 다리 등 신체 선이 도드라지게 채색했다. 작가의 붓질에 따라 오랜 시간 비바람을 맞으며 세월의 흔적을 안고 있던 너와는 고유의 형상을 드러낸다. 작가는 “너와의 표면이 오래산 사람들의 피부처럼 세월과 더불어 제각각의 사연을 전한다”며 “너와에서 각기 다른 표정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나를 발견하듯 뾰족하던 부분까지 치유되고 스스로가 순화된 느낌”이라고 소개한다.

마흔 나이에 미술에 입문한 윤 씨는 회화를 거쳐 나무를 소재로 어머니, 여성의 이미지를 비롯해 유기견 등 생명을 형상화해온 조각가. 그동안 나무판을 잘라서 화판 삼아 작업했지만 이번 신작은 용도 폐기된 나무 그대로 수십 년 세월의 형상을 되살려내는 작업을 시도했다.

평범해 보이는 나뭇조각에 몇 개의 검정선이 더해지면서 또렷한 눈망울의 미인도가 탄생했다. 유난히 나무색이 짙은 부분을 머리카락처럼 묘사하고, 오목하게 들어간 옹이는 활짝 웃거나 소리치는 입으로 자연스럽게 이목구비가 표현됐다. 볼록하게 튀어나오거나 부드러운 곡선은 몇 번의 붓질만으로 가슴이나 목선처럼 입체적인 느낌이 살아났다. 나뭇조각의 갈라진 틈새나 얇게 깎인 부분도 여성이 두 손을 모으거나, 책이나 꽃을 든 형상이 원래 그려져 있었던 듯 자연스럽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너와 인물화’와 별도로 가로세로 30㎝ 크기의 한지 수백 장을 이어 붙인 ‘그린 룸’ ‘화이트 룸’ 등의 설치작품도 선보인다. 그동안 핑크, 블루, 화이트 등 3색을 주조색으로 ‘룸’시리즈를 발표해온 작가는 이번엔 2011년 경기도미술관서 발표한 ‘화이트 룸’시리즈를 재구성하는 한편, 중앙 전시장을 온통 녹색으로 꾸민 신작 ‘그린 룸’을 선보인다. 한지를 접고 오려 각양각색 인물과 문양을 표현한 녹색 한지를 벽지처럼 장식하고, 바닥에 녹색 구슬과 연꽃무늬의 탁자와 의자를 설치한 ‘그린 룸’은 숲속 같은 자연친화적 분위기로 생명의 의미를 일깨운다.

글·사진=신세미 기자 ssem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