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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한국사회 / 박인석 지음 / 현암사

미국에서 나고 자란 한 교포는 얼마 전 한국에 온 소감을 이같이 표현했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서 발코니가 있는 전면부를 모조리 잘라내면 모든 사람이 똑같은 거실, 똑같은 방에서, 동일한 스타일로 살고 있다는 영상이 머릿속에 그려져요.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어요.”

1960년대 주거지 고층화 시도와 함께 불붙은 아파트 짓기 경쟁은 이웃과의 단절, 공동체 정감의 상실 등의 부작용을 낳았다는 숱한 비판에 시달려 왔다.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자 “이제 아파트 시대는 막을 내렸다”는 지적에서부터 저자의 말에 따르면 ‘부동산·아파트·강남불패라는 종교적 시장 예측’까지 다양한 관측이 충돌하고 있다.

책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엄마를 착취해서 얻은 넓어 보이는 집’, 여성 잡지의 단골 메뉴 중 하나가 주거공간은 덜 차지하면서 수납공간을 늘리는 지혜다. 저자는 한국 아파트의 수납공간 부족 상황은 유난하다고 꼬집는다. 아파트 수납공간이 부족하면 주부들이 청소를 하고 또 해도 거실과 방이 금방 어질러진다. 넓어 보이는 집이 가사 노동, 즉 엄마의 착취를 대가로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건설업체들이 수납공간을 충분히 만들지 않는 이유는 아파트가 모델하우스를 통해 분양되기 때문이다. 업체 입장에서는 분양률을 높이기 위해 수납공간을 줄이더라도 넓게 보이는 효과를 겨냥해 설계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아파트가 인기를 얻는 핵심 이유로 열악한 도시 환경 속에서 중산층의 주거 환경욕구를 사로잡는 아파트 단지의 매력 때문이라고 봤다. 아파트 단지는 삭막한 도시 환경 속에서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다. 단지는 어린이 놀이터, 주민을 위한 스포츠센터, 경로당, 미니 공원 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장점이 있지만 아파트가 한국사회의 삶터 문제에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파트 단지화 전략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단지화 전략은 주도면밀한 정책의 산물이었다. 우선 고밀 개발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책에 따르면 미개발지 한가운데에 도로와 전철을 연장하고 고밀도 아파트 단지들을 먹음직스러운 포도송이처럼, 고밀도로 주렁주렁 매단 신도시 개발이 전형적이다. 이는 도시 생태계 입장에서는 동맥경화에 걸린 격이라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새로운 산업이 밀려와도, 새로 도로가 뚫려 상점이나 사무실 수요가 늘어나도 이에 대응하기 어렵다. 수백, 수천 가구가 공동 소유인 아파트 단지가 일단 들어서면 변신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국내 유명 주상복합아파트의 가격대는 같은 평수라도 남향일 경우 6억∼7억 원 정도 비싼 경우가 많다. 저자는 뿌리 깊은 남향 선호를 유럽, 미국 등과의 기후 차이에서 찾았다. 우리나라보다 위도가 높은 파리나 런던, 암스테르담, 베를린 등 북유럽의 도시들은 1년 중 절반이 흐리고 비 오는 날씨다. 그래서 이들 도시에서는 햇볕이 나기만 하면 모두 옷을 벗고 밖에 나와 일광욕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반면 한국인들은 1년 내내 햇볕 부족을 모르는 기후에 산다.

“사시사철 햇볕이 충분한 한국에서는 햇볕의 질을 따진다. 아침에 비추는 동쪽 햇볕이나 저녁 시간 서쪽 햇볕은 집 안 깊숙이 들어온다. 태양 고도가 낮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집 안 깊숙이 들어오는 햇볕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더운 여름날 온종일 더위에 시달린 집 안을 깊숙이 비춰대는 뜨거운 서쪽 햇볕은 질색이다. (중략) 당연히 남향 집이 인기일 수밖에 없다.”(235∼236쪽)

저자에 따르면 유럽 건축가들은 이미 20세기 초에 일조량을 세밀하게 분석해 남북축에서 서쪽으로 22.2도 기울어진 방향으로 건물을 배치해야 겨울철에 가장 많은 일조를 받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오전에는 동쪽 햇볕을, 오후에는 서쪽 햇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진수 기자 jiny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