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연극 ‘사랑을 묻다’에선 대학 겸임교수인 명호(김용준 분)와 학생인 희연(김희연 분) 간에 사랑의 감정이 점차 커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왼쪽부터 처음으로 한곳을 바라보는 두 사람, 이어폰으로 같은 음악을 듣는 두 사람과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극단 이루 제공

중년의 겸임교수와 여제자와의 사랑. 이 뻔하디 뻔한 스토리를 연극적 기법으로 절묘하게 포장한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지난 23일부터 6월 9일까지 서울 혜화동 선돌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사랑을 묻다’이다. 1시간 40분의 공연시간 동안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웃음과 함께 이어지는 장면에 대한 흥미를 끊임없이 불러일으킨다. 막이 내리면, 관객들은 어느덧 연극 제목대로 ‘사랑이 뭐지’라고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아가 연극과 현실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곰곰 생각하게 된다.

‘사랑을 묻다’의 가장 큰 장점은 연극 줄거리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대사를 절묘하게 엮어 보는 이로 하여금 ‘한 발 물러서 지켜보게 한다’는 것. 극 중에서 또 다른 극을 진행함으로써 관객에게 거리감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곧 무대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관객들이 좀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즉 사건을 따라가면서도 등장인물의 관점에서, 또한 관객 자신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연극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50세, 중년의 명호는 삶에 지쳐 있다. 대학에서 겸임교수로 연극 연기를 가르치는 그는 20대 시절 텅 빈 무대에서 흘린 눈물을 기억하며 현실에서 다시 한번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연기하고 싶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열정이라고 생각하며, 그 같은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다. 어느새 명호는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 희연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랑이 현실의 사랑인지 연극을 통해 자신이 만든 환영인지 헷갈려 한다.

희연 역시 명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아버지를 닮은 명호를 사랑하는지, 명호를 닮은 아버지를 사랑하는지 자신조차 종잡을 수 없다. 결국 명호와 희연은 자신들이 만든 감정을 자신에게 묻는다. 그 같은 감정의 주인인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다.

연극에는 또 다른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이 들어 있다. 등장인물들은 극 중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기하지만 이 역시 사건 전개와 맞물려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을 묻다’의 또 다른 버전인 것이다. 한마디로, 연극 ‘사랑을 묻다’는 서로의 가슴에 서로를 묻어버리고 마는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다. 어쩌면 상투적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연극적 기법으로 감싸 안아 전혀 지루하지 않게 포장한 극작과 연출이 돋보인다. 출연 배우들의 열연 또한 예사롭지 않다.

아울러 ‘사랑을 묻다’는 연극 또는 연기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남자(명호)는 배우의 연기가 만든 감정은 진실(진짜)이지만 자신과 거리를 둔,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며 만든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연기를 가르친다. 여자(희연)는 남자에게서 연기를 배우며, 연기 속의 자신이지만 자신이 아닌 감정을 발견한다. 결국 어디까지가 연극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지금 이 감정이 연극인지 아닌지를 끊임없이 묻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랑을 묻다’는 관객에게 ‘연극을 보는 재미’를 듬뿍 선사한다. 그 점에서라도 이 연극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손기호 작·연출. 김용준·우미화·조주현·최정화·나종민·임정선·하지웅·김희연·김태리 등 출연. 02-747-3226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