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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란/숙명여대 법대 교수·법학

4월 국회에서도 추가경정예산안 처리 때문에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들의 국회 통과가 무산됐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여야 공히 화두로 삼았던 경제민주화라는 말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릴 즈음에 갑을(甲乙)관계로부터 야기되는 병폐들이 연일 사회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힘이 약한 을은 갑의 횡포와 오만을 참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선거 때는 울분을 참는 을들이 숫자상 절대다수이기 때문에 갑보다는 약자(弱者)의 위치인 을에 유리할 것 같은 경제민주화의 실천공약이 득표 수단이었으나 막상 선거가 끝나고 나면 돈과 힘의 우월적 지위를 지닌 갑의 위세에 밀려 경제민주화의 시도가 제자리걸음이고 이대로 가다가는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될 조짐이 농후하다. 물론 경제민주화가 우리 사회 곳곳의 모든 잘못된 갑을관계를 근절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야 모두 경제민주화를 통해 갑을관계 개선을 도모하려는 공통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이 약자들의 고통과 울분을 충분히 대변하지 못하는 사이, 여러 곳에서 부당한 관계로 인한 을의 상처가 곪아터지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 등이 ‘갑·을’이라는 단어 자체에 지위의 우열이 포함돼 있다고 판단해 갑과 을이라는 호칭을 아예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나 네티즌들로부터 ‘발 빠른 꼼수’ ‘본질을 외면한 처사’라는 빈축을 사고 있다.

갑을이란 본래 서구의 자유평등 의식을 기초로 확립된 계약자유의 원칙에 따른 계약 체결 때 두 당사자를 가리키는 약칭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자유는 허울뿐 그 이면에 힘의 논리가 지배함으로써 힘이 없는 을은 갑의 횡포를 참는 수밖에 없고 이런 부당한 당사자 관계를 이른바 갑을관계라고 칭한다. 편의상, 순서대로 갑과 을로 표기하는 것일 뿐 A·B라든지, 나·너라든지, 철수와 영이로 한들 용어가 무슨 문제이겠는가.

올바른 갑을관계 정립을 위한 해법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렇다고 얄팍한 땜질이나 체념이나 포기도 금물이다. 요즘 정부는 나름대로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검찰의 조사를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증요법만으로는 해묵은 갑을관계의 척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어림없다. 앞으로 이런 기관의 조사가 정상적이고 당연한 업무 수행으로 상시 지속돼야 한다.

우리 사회의 오래된 관습과 병폐를 척결하는 대책으로 경험적으로 증명된 방법이 있다. 성폭력특별법의 제정이 그것이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라든지,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등 유례없는 중한 처벌을 하는 특별법을 만든 것이다. 온통 성폭력과 성희롱이 만연해 있을 때 피해자를 대변하는 여성 사회단체들이 주축이 돼 당시 대통령의 힘을 빌려 상의하달(上意下達)식으로 성폭력특별법을 만들었다. 제정 당시 전문가들을 포함한 많은 남성의 비판과 조소(嘲笑)가 많았고, 실제로 법리적으로 법체계상으로 다소 문제되는 점도 있었다. 그러나 특별법 제정의 형식을 빌려 강력히 규율함으로써 장기간 타성화·일상화된 폐해가 뿌리깊어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던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

현행 근로기준법이나 주택임대차보호법과 같은 법률이 경제적 약자인 을을 보호하는 예가 될 수 있으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 각 분야 갑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는 사안별로 잡다한 많은 법보다는 갑을관계에 관한 보다 더 강력하고 종합적인 특별법을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성폭력’이라는 단일 의제와 달리 갑을관계는 유형이 천차만별이고, 갑이 을이 되기도 하는 등 복잡해 간단치 않은 문제다. 그러나 이런 특단의 각오가 없이는 갑을관계를 단시일에 개선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는 차제에 갑을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독립된 기구를 만들든지, 국민권익위원회의 기능을 확대·강화해 국민 편익 증진 차원에서 특정 분야가 아닌 모든 분야의 올바른 갑을관계 정립을 모색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미사일을 쏘는 갑과 총을 들고 뛰는 을에게 계약은 자유이니 맘대로 하라고 내버려두지 말고 을의 후견적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정부와 국회다. 그래야 갑을관계가 선악(善惡) 대결로 악화되지 않고 사회통합도 가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