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과 철학 / 마크 D. 화이트 외 엮음, 남지민 외 옮김 / 그린비

영화는 때로 훌륭한 철학 교과서 역할을 한다. 영화 속에 숨겨진 의도를 찾아내는 과정은 탐정소설을 읽어내는 것 못지않게 흥미롭다. 예컨대 러시아 거장 감독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심오한 철학과 철학적 대사, 존재의 근원을 건드리는 영화 언어의 구사 등으로 어지간한 철학서를 압도한다. 예술영화가 아닌 배트맨과 같은 대중영화에도 철학적 코드가 숨 쉬고 있을까?

70년이 넘는 동안 만화와 영화 등에서 수많은 작가와 감독이 창조한 배트맨은 웬만한 철학자의 작업보다 더 풍부한 철학 주제를 담고 있다.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주인공 웨인이 배트맨이 되는 것은 최상의 선택이었을까. 배트맨은 기존 영웅 캐릭터와 다른 점이 많다. 슈퍼맨과 스파이더맨은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악당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지만 배트맨은 조커를 끝내 죽이지 않는다. 조커 한 명을 죽이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데도 살인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킨다.

책은 스티븐 커슈너(철학) 뉴욕주립대 프레도니아캠퍼스 교수 등 각국 철학자 22명이 배트맨의 철학적 정체성을 명료하게 고찰한 것이다.

의무론자인 칸트와 마찬가지로 배트맨도 행위로 인한 결과보다는 행위 자체에 내재한 특징을 기반으로 도덕성을 판단한 전형적인 캐릭터다.

배트맨의 곁을 지치는 집사 알프레드를 도교적 관점에서 해석한 대목도 흥미롭다. 책에 따르면 알프레드는 도교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인 위무위(爲無爲), 즉 ‘함없이 함’을 갖췄다. 이 같은 철학을 배경으로 그는 배트맨에게 귀한 도움을 주지만 배트맨이 알아채지 못했던 단서나 상상하지 못했던 가능성, 그가 놓쳤던 통찰을 간파한다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공리주의를 현대에 부활시켰다는 평가를 듣는 실천윤리학가 피터 싱어는 배트맨을 다른 각도에서 관찰했을 것이라고 본다. 영화의 주인공인 웨인이 배트맨이 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부모의 죽음과 그의 부모가 영화에 등장하는 고담시에 바친 헌신 등 과거를 바라본다.

반면 싱어는 어떤 행동의 중요한 측면은 미래에 일어날 결과와 연결돼 있다고 진단한다. 싱어라면 배트맨이 과거의 부담스러운 기억은 버리고, 악당과 싸우는 대신 그의 막대한 돈을 굶어 가는 가난한 이들에게 증여하도록 강요했을 것이다.

배트맨이 소년 로빈을 후계자로 키우는 것도 미성년자를 위험에 노출시키고 폭력 세계로 유도하는 것은 정당치 못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반면 배트맨이 어디까지나 플라톤 등이 주창한 ‘덕 윤리학(virtue ethics)’을 따랐다며 그를 지지하는 의견도 솟아오른다. 규범적으로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보다 행위 주체의 성격이나 환경, 훈련의 중요성을 내세워 로빈을 키웠다는 주장이다.

책은 배트맨과 슈퍼맨 중 누가 더 훌륭한 영웅의 전범인지, 조커의 도덕적 책임은 어디까지인지 등을 놓고 치열한 토론을 벌인다. 외국어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4명의 학생이 번역한 점도 눈길을 끈다.

예진수 기자 jiny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