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23일 서울 시내 한 아웃도어 전문매장을 방문한 한 소비자가 다운 재킷 소매에 새겨진 필파워 수치를 살펴보고 있다. 심만수 기자 panfocus@munhwa.com

“필파워(Fill Power·털 제품이 구겨졌다가 부풀어 오르는 복원력) 수치가 높을수록 무조건 좋은 재킷 아닌가요?”

예년보다 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는 올겨울, 다운 재킷을 구매하기 위해 매장에 방문한 소비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응이다. 직장인 주용현(29) 씨도 마찬가지다. 주 씨는 현재 국내 중소형사의 필파워 700짜리 다운 재킷을 입고 있지만 필파워 수치가 높을수록 좋은 재킷이라는 생각에 필파워 1000인 제품을 고려하다가 비싼 가격 때문에 구매를 포기했다. 주 씨는 “필파워 수치가 높을수록 재킷 가격도 덩달아 비싸지는 것 같았다”며 “주위에 필파워 1000인 제품을 입은 친구가 있는데 막상 입어보니 딱히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주부 김지혜(30) 씨는 지난해 12월 100만 원이 넘는 다운 재킷를 구매하려는 남편과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김 씨의 남편은 필파워 1000인 점퍼가 가장 좋은 점퍼라며 비싼 가격에도 구매를 강행하려 했다. 하지만 김 씨의 남편은 ‘숫자가 높을수록 좋다’는 것 외에 비싼 가격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결국 백화점에서 필파워 700인 40만 원 상당의 점퍼를 구입했다.

올겨울 예년보다 추운 날씨가 이어지면서 보온을 위해 다운 재킷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크게 늘면서 아웃도어 업계는 겨울철 다운 재킷의 보온성을 강조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제품의 필파워가 높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재킷의 소매에 필파워 수치를 새길 정도다. 밀레에서 지난해 11월 출시한 ‘초모랑마 헤비다운 재킷’은 필파워 1000을 기록한 구스다운 재킷으로 혹한의 환경에서도 입을 수 있다고 광고하고 있다. 이 제품의 소비자가격은 120만 원에 달한다.

하지만 필파워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 채 숫자가 높을수록 좋은 제품이라고 막연하게 인식하고 있는 소비자들이 많아 아웃도어 업계가 이를 판매촉진과 가격인상에 활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일부 업체들은 아예 필파워 수치를 밝히지 않고 있고, 비슷한 수치의 필파워를 가진 제품들의 가격도 천차만별이어서 필파워 수치 자체의 신뢰도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24일 아웃도어 업계에 따르면 필파워는 다운 재킷의 품질을 측정하는 방법 중 하나로 필파워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보온력이 좋은 것을 나타낸다. 구체적으론 오리털이나 거위털 1온스(약 28g)를 하루 동안 압축시키고 이후 얼마나 부풀어 오르는지를 확인한 수치이다. 필파워 800이 의미하는 것은 28g의 털이 800세제곱인치까지 부풀어 오른다는 뜻이다. 이 수치가 높을수록 더 크게 부풀어 오른다는 뜻으로 숫자가 클수록 보온력이 좋다는 것에 대해선 이견이 없는 상태다. 하지만 필파워가 다운 재킷의 품질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지에 대해서는 국내외 전문가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미국의 유명 아웃도어 전문가인 크리스틴 호스테터는 “필파워가 높은 재킷일수록 더욱 푹신푹신하고 재킷이 푹신푹신할수록 더 따뜻해진다”며 “높은 필파워를 가진 제품에 대해 돈을 더 지불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국내 아웃도어 업계 한 관계자는 “필파워는 공신력 있는 기준이나 인증이 아닌 단순히 보온성에 대한 성능테스트 중 하나”라며 “재킷을 팔기 위해 필파워를 명시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몇 이상이어야 한다는 법도 없는데 국내 아웃도어 업체들이 이를 경쟁적으로 판매에 활용하고 있다”고 필파워의 의미를 평가절하했다. 실제로 프랑스산 몽클레르 다운 재킷의 경우 200만 원을 호가하고 있지만 필파워에 대해선 명시하지 않고 있고 빈폴 아웃도어의 경우엔 아예 필파워라는 수치 자체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비슷한 수치의 필파워를 가진 재킷 가격이 천차만별인 것도 필파워 수치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또 다른 요인이다. 예를 들어 필파워 850인 휠라코리아의 ‘골드다운’은 시중에서 14만9100원에 구매할 수 있지만 백화점에서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는 필파워 700의 노스페이스 서밋 패딩재킷은 47만 원으로 30만 원 넘게 차이가 났다. 필파워 800인 K2의 ‘마조람 패딩재킷’의 가격은 48만9000원이었고 필파워 수치를 밝히지 않은 컬럼비아의 ‘YM3288’ 재킷은 59만8000원에 팔리고 있었다. 지난해 12월부터 1월 둘째주까지 서울 시내의 한 유명 백화점 매출순위를 총 집계한 결과 필파워 700∼800 사이의 제품이 인기리에 팔리고 있어 필파워와 소비자들의 실제 선호도는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웃도어 업체들이 필파워를 단순히 마케팅 도구로 활용하면서 제품 가격을 올리는 데에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 나올 만하다.

이진석 홈플러스 아웃도어 담당 바이어는 “아웃도어 업체들이 소비자들에게 막연히 수치가 높으면 좋다고 설명하는 등 필파워가 품질지표가 아닌 업체들 간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며 “거위털이나 오리털의 원산지가 유럽인지 중국인지, 안감은 어떤 소재를 썼는지에 따라 제품의 품질이 달라지는 만큼 단순히 높은 필파워를 기록했다고 해서 좋은 재킷으로 보긴 어렵다”고 밝혔다.

노기섭 기자 mac4g@munhwa.com

이미지 크게보기 필파워 1000을 표시한 한 제조사의 시중 판매 재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