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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믿되 사람은 믿지 말라!

눈을 뜨기 전에 먼저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손가락과 발가락을 동시에 굽혔다가 펴보았다.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쏟아지는 빛에 눈이 부시고 초점이 정확히 잡히지 않았다.

“한심하군. 제 몸 하나 챙기질 못해 이 꼴을 당하다니…….”

왕대인의 힐책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마취가 덜 풀렸나 보다. 또 다른 이는 다만 내 손을 꼭 쥐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마리아였다.

그리고 또 얼마나 시간이 지나갔을까.

냄새 따윈 맡지도 않고 눈부터 떴다. 마리아는 여전히 내 손을 쥐었고, 왕대인은 그 뒤에서 나를 노려보고 섰다. 가만히 입술을 벌려보았다. 다행히 쩝 소리와 함께 마른 입술이 갈라졌다.

“특위는……?”

흐린 정신이었지만 반민특위가 걱정이었다. 새벽에 조사관을 납치하려던 놈들이라면 무슨 짓을 못할까.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 아니랄까 봐 제 몸보다 조직 걱정부터 하는 거야?”

“윤남수…… 조사관을 불러주십시오.”

“안 돼. 그는 못 와.”

“못…… 오다니요?”

왕대인이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오늘 아침 8시, 경찰이 반민특위를 무장해제 시켰어. 특경대원 30명을 체포했고 저항하던 조사관과 일부 직원도 함께 연행되어 지금 조사 중이야.”

“경찰이 왜 반민특위를…… 무장해제 시킵니까? 이건 불법입니다…… 누구 지십니까? 서울시 경찰국장입니까?”

“말을 아껴. 반민특위 조사관으로 자네가 하려던 일은 높이 평가해. 하지만 반민특위가 자네 삶의 마지막은 아닐세. 앞으로 더 중요하고 훌륭한 일을 해내야지. 몸부터 챙겨. 곧 수술에 들어갈 거야. 반민특위 일은 잊어.”

더 따지고 싶었다. 친일파 청산도 못하면서 어떻게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튼튼하게 세우겠습니까. 나는 반민특위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민특위가 무너지면 내 삶도 무너집니다.

얼마나 시간이 더 흘렀을까.

형광등도 침침한 새벽이었다. 마리아는 없고 왕대인만 곁에 앉아 잠이 들었다. 그의 팔목을 쥐곤 물었다.

“……당신이 시킨 겁니까?”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자넬 죽이려 한단 말인가? 장철호와 자넬 만나게 하려고 밤낮없이 공책을 채운 나를 지금 의심하는 건가? 수술 시켜 겨우 살려놨더니 한다는 소리가 뭐? 당신이 시킨 거냐고?”

왕대인은 내 질문을 잘못 받아들이고 화를 냈다. 오히려 그가 화를 냈기 때문에 다음 질문이 편했다.

“권혁필 말입니다……. 당신이 시켜서 없앤 겁니까?”

왕대인도 내 질문의 진짜 표적을 알아차리고 여전히 노기등등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내가 살인자로 보이나?”

“죽이지 않았다면…… 밀항이라도 시킨 겁니까? 샅샅이 뒤졌지만 없습니다. 권혁필은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듣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말이라고…….”

“그래서 지금 후회하는 건가? 그깟 집사 놈 말을 듣지 못해서? 내가 그를 죽이거나 도피시킬 까닭이 없지. 그놈이 무슨 말을 하든 믿을 사람은 없으니까. 그놈이 사기 전과만 7범이란 얘긴 했던가. 장 은행장이 사람이 좋아서 그런 놈을 집사로 데리고 있었지, 쫓겨나도 벌써 쫓겨났을 퇴물이야. 장 은행장 밀실 금고까지 털어갔던 건 모르지?”

마리아가 병실로 돌아왔다.

“수술은 잘 끝났어. 다행히 혈관을 피해갔기 때문에 후유증도 작을 거래.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서 열흘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대. 이만하기 다행이다.”

나는 마리아가 쥔 손을 슬그머니 뺐다. 그리고 왕대인을 째려보며 물었다.

“‘BANK’는 다 썼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