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철호가 속삭였다.

“철인호에서 살아 돌아온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자들이 좀 있어. 손을 봐주겠다고 공공연하게 장담도 하고 말이야. 성가실 일이 생길까 봐 잠시 변장한 거야. 별일 아냐.”

“권 행수가 괴롭혀?”

현주는 그젯밤 자신의 손목을 다정하게 쥐던 혁필의 얼굴을 떠올렸다.

“꼭 그가 움직이지 않아도 알아서 기는 놈들이 늘 있기 마련이지. 미리미리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철호가 말머리를 돌렸다.

“어제 공연은 최고더구나. 이제 인천의 장현주가 아니라 대한제국의 장현주, 나아가 세계의 장현주가 되겠어.”

현주가 더욱 놀랐다.

“종현성당에도 왔었어? 못 봤는데? 튤립만 받았고. 대기실로 왜 만나러 안 왔어? 공연은 열심히 해서 잘 마쳤지만, 오빠가 없어서 마음 한 구석이 얼마나 허전했다고…….”

철호가 농담처럼 가볍게 말했다.

“초청장을 기다린 건 나야.”

“목소리가 완전히 돌아오기 전엔 초청장 돌리는 게 부끄러워.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은 아냐. 늦어도 내년 여름까진 원래 내 목소리를 찾을 거야. 그땐 정식으로 초청장을 보낼게. 약속해.”

현주의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혁필에게 갖은 수모를 당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그미였다.

“장철호의 여동생이 아니라 대한제국 으뜸 가수 장현주로 우뚝 설 날이 멀지 않았군.”

“그래도 난 장철호의 여동생 장현주가 좋아. 여기까지 날 끌어준 이가 바로 오빠니까!”

철호가 현주의 얼굴을 뜯어보며 안타까워했다.

“많이 야위었구나. 명종이 편에 네가 아편을 끊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들었다.”

“다 천주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신 덕분이지. 그런데 인천엔 무슨 일로 가는 거야?”

“아주아주 중요한 일!”

잠시 말을 끊었다가 여동생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장현주의 세례식!”

“정말? 답동성당으로 가는 길이다 이 말이지?”

“난 천주님을 믿을 생각은 아직 없지만, 세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아. 개성을 떠난 후 단 한 번도 네 생일을 챙겨 주지 못했는데, 오늘은 세례식에도 참석하고 만찬도 함께 하고 싶구나.”

“고마워 오빠! 세례식은 5시부터야. 난 세례 준비 땜에 신부님이랑 마지막 교리 공부를 해야 해.”

“신경 쓰지 마. 모처럼 부두에라도 나가 보지 뭐. 근데 세례명은 정했어?”

“응. 마리아야.”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철호는 감옥에서 읽었던, 예수의 일생을 다룬 책에서 동정녀로 등장한 여인을 떠올렸다.

“아니! 성모님 말고 마리아 막달레나!”

철호는 또 다른 마리아의 행적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어느 해설서의 설명을 떠올린 후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필이면 왜 마리아 막달레나를 택했어?”

예수를 만나기 전 마리아 막달레나가 창녀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추정을 따져 묻진 않았다. 창녀라는 두 글자를 입에 올리기조차 싫었던 것이다. 기생이 창녀인 것은 아니지만 세례명에서까지 현주의 어두운 과거와 비슷한 느낌을 받고 싶진 않았다. 현주는 오히려 상쾌하게 웃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창녀라는 구절은 성경 어디에도 없어. 다만 인생의 바닥을 아셨던 분은 확실한 것 같아. 그 세례명이면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편히, 이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을 어루만지는 노래를 하며 살 것 같아. 다음부턴 날 마리아 막달레나라고 불러 줘.”

“알았어.”

“여기서 한번 미리 불러 볼래?”

여동생의 손을 꼭 쥔 채, 지난 시절의 고통과 슬픔을 깨끗이 씻고 거듭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세례명을 불렀다.

“마리아 막달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