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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는 챙이 큰 모자를 쓰고 두툼한 털 코트를 목까지 올려 채운 채 경인선 기차에 올랐다.

다른 칸은 빈자리 없이 빽빽한데, 현주가 배정받은 마지막 칸만 텅 비었다. 기적 소리가 두 번 연이어 울리고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할 때까지도 그 칸을 오르는 이가 없었다. 현주는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제 잠시 멈췄던 흰 눈이 한 송이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종현성당 주임신부는 내년 부활절에도 특별찬양회를 열어 달라 했고, 배재학당 교사를 비롯한 서너 명이 더 공연 계획을 문의해 왔다.

함께 인천으로 돌아갈 예정이던 땅꼬마가 현주의 객실 문을 두드린 것은 오늘 새벽이었다. 공연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탓인지, 현주는 땅꼬마가 문을 열 번이나 두드린 다음에야 겨우 이불을 걷었다. 문을 여니 땅꼬마가 깨끗한 양복에 모자까지 쓰고 길 떠날 채비를 마친 채 서 있었다. 현주가 부어오른 볼을 손등으로 눌러 가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10시 기차 아니었나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요.”

땅꼬마가 답했다.

“인천에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저만 먼저 출발하란 행수 어른 명이십니다. 혼자 인천으로 오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이 무슨 행운인가 싶었다. 혁필은 현주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북두칠성 한둘을 늘 붙였다. 말이 보호지 인천을 떠날 궁리를 하지나 않을까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한양에서 인천으로 돌아가는 짧은 시간이지만 감시의 눈초리가 사라진 것이다.

중절모를 쓴 사내가 긴 수염을 휘날리며 기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입구 쪽에 앉더니 책을 꺼내 폈다. 현주는 등 뒤에 앉은 그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이 넓은 공간에 오직 그와 나 둘뿐인 것이다.

답답한 시간이 흘러갔다.

현주도 교리문답서가 끼어 있는 성경을 꺼냈다.

기차가 인천에 닿으면 곧장 답동성당으로 가서 준비를 하고 세례를 받을 예정이었다. 아편을 끊고 세례를 받을 결심을 굳힌 후론 매일 밤 아무리 피곤해도 성경 한 장씩은 꼭 읽고 잠자리에 들었다. 어젯밤 공연을 마친 후 숙소로 돌아와서도 성경을 폈지만 한 줄도 읽기 전에 잠이 들었다. 어제 읽다가 만 부분을 찾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작은 소리로 따라 읽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성경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발소리 때문이었다. 각양각색의 승객들이 둘만 있던 칸으로 밀어닥쳤다. 아기 업은 아낙이며 허리가 굽은 노파, 긴 담뱃대를 뻐끔거리는 갓 쓴 양반까지 재빨리 빈자리를 채워 나갔다. 봇짐을 진 보부상 열 명까지 한꺼번에 들어와서 현주의 앞과 뒷자리를 점령했다. 그미의 옆에 앉는 이는 없었다.

중절모 사내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승객들이 모두 착석한 뒤였다. 검은 가죽 가방을 어깨에 멘 채 좁은 통로를 걸어 나왔다. 그가 주저하지 않고 현주 옆에 섰다. 중절모를 벗고 그미를 향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주름이 많은 눈이었지만 어딘지 낯이 익었다. 사내가 수염을 쓸며 정중하게 청했다.

“동석해도 되겠습니까?”

낮고 깊은 목소리, 철호였다.

“오빠!”

현주가 깜짝 놀라며 철호의 손을 쥐었다가 제 입을 막았다. 팔을 당겨 옆에 앉혔다.

“개성에 있는 거 아니었어? 업무가 많아서 한양으로 오기 힘들다며? 모자에 수염에 꼴이 이게 다 뭐야?”

“너랑 편하게 기차 여행을 하려고 신경을 좀 썼지. 잘 어울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20년은 더 늙어 보여. 못 알아볼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