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양수/경제산업부 차장

지난달 국내시장에서 수입차를 제외한 5대 완성차의 공장 출고대수가 전년동월 대비 25%나 감소한 8만6000대에 그치자 여기저기서 내수형 장기불황이 장기화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사태를 더 비관적으로 보는 이들은 지금 우리의 상황을 지난 1990년대 버블붕괴와 함께 장기불황에 접어들었던 일본 경제상황과 비슷하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우리 경제가 10년간 지속된 일본식 장기불황의 전철을 밟게 될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순 없지만 최근 정부 당국이나 정치권의 대응을 보면 현실을 도외시한 외눈박이 경제처방들이 너무 판친다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다.

일본 경제의 장기불황이 버블 붕괴에 따른 자산가치의 급격한 하락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주가, 지가 등 자산가격이 장기간 하락하면서 설비투자와 소비 등의 수요가 위축됐고, 이는 기업 부도와 은행 부실채권의 누적으로 이어져 실물경제와 금융경제가 한꺼번에 악순환의 늪에 빠졌다. 일본 개개인들도 자산가치가 떨어져 손해를 보자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기업은 자금난 때문에 투자를 하지 않고, 국민은 소비를 하지 않으니 경기가 되살아날 리 만무했다. 이후 정부의 여러 정책에도 불구하고 2001년까지 무려 11년 가까이 경제성장률이 평균 1.1%에 그치는 유례없는 장기불황이 지속됐던 것이다. 금융기관에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경기부양을 위해 10년간 110조 엔이 넘는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지만 돈이 돌지않자 결국 일본정부는 2001년 3월 ‘제로금리 정책’ 복귀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눈을 다시 국내로 돌려보면 몇가지 점에서 일본의 장기불황 당시와 비슷한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우선 끝모를 바닥으로 꺼지고 있는 내수경기가 그렇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가계부채와 신용불량자 문제는 이러한 소비불황의 장기화를 부추기는 악재가 되고 있다. 기업의 투자부진, 높은 청년실업, 수출실적 악화 등 어느것 하나 희망적 요소를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당초 3.2%에서 2.6% 낮추는 등 국내외 경제연구소와 기관들이 줄줄이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2%대로 내려잡고 있는 것도 심상치 않은 조짐이다. 결국 경기가 나빠지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계층은 서민들이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 당시를 보더라도 그래도 가진 게 있는 부류는 경제 혹한기를 버텨낼 힘이 있었지만, 고통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하는 일반 서민들의 삶은 더욱 고달파졌다.

오는 12월 치러질 18대 대통령 선거를 100여 일 앞두고 여야 가릴 것 없이 ‘경제민주화’가 최대 화두가 되고 있다. 누가 더 경제민주화에 투철한지 놓고 선명성 경쟁까지 벌어지는 판국이다. 그런데 최근 여야의 경제민주화를 둘러싼 선명성 경쟁이 ‘대기업 때리기’로 이어지면서 의욕만 앞서 시장을 마구잡이로 억압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정부 당국의 대응도 여전히 안이하기만 하다. 세계가 한국의 경쟁력 약화를 우려하고, 성장률은 갈수록 떨어지는데도 정부가 기업투자와 내수를 살리겠다며 내놓은 게 이른바 ‘스몰볼(소규모 대책)’이다. 경기를 살리기 위한 근본적 처방은 뒤로 미룬 채 미시적인 정책으로 효과를 노리겠다는 의도인 것 같다. 떨어지는 경제성장 동력을 되살리기 위한 체계적인 장·단기 대책이란 찾아볼 수 없다. 정권 말기에 모든 경제부처가 두손 놓고 ‘관리’만 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병이 ‘고황’에 들면 백약이 무효라는 것을 망각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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