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사진 = 심만수기자 panfocus@munhwa.com

순수와 관능은 극으로 통한다. 삶의 때가 묻은 빛바랜 애욕은 육체에 갇히지만, 티 하나 묻지 않은 순수의 강렬한 빛은 정신을 뒤흔든다. 그래서 순수로 자극된 관능은 멈출 수가 없다. 영화 ‘은교’에서 욕망의 영속성을 암시하는 은교(김고은)는 순수해서 관능적이다.

어느 날 시인 이적요(박해일)의 집 앞마당 의자에 무턱대고 누워 있는 ‘침입자’로부터 이적요가 발견한 것은 탐스러운 육체가 아닌 자신의 권위에 반하는 ‘순수’였다. 스승의 천재적인 재능을 질투한 제자(서지우)의 무조건적인 복종과 권위에로의 추종에 익숙한 이적요에게 은교의 순수는 ‘욕망’과 ‘사랑’의 어느 지점에서 느끼는 혼란이고, 감춰야 하는 욕망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벗겨진 자아의 창피함이다.

최근 서울 중구 충정로 문화일보에서 만난 김고은은 ‘은교의 순수와 관능에 대한 관계’에 대해 “특별한 미모도, 매력도 보이지 않는 어린 소녀가 노인의 욕망을 부추긴 것은 순수 때문”이라고 했다.

“영화에선 내 몸의 구석구석이 카메라를 통해 자세히 관찰되죠. 무릎을 꿇고 걸레를 닦을 때 비치는 속옷도, 허리를 숙일 때 비칠 듯 말 듯하는 가슴도 은교는 전혀 의식하지 않아요. 할아버지를 ‘남자’로 생각하지 않은 게 아니라, 어떤 남자도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바라보는 은교의 본질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랑받지 못한 아이는 이적요의 ‘애정’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은교의 관능은 의도되지 않았지만, 이적요의 욕망은 은교의 순수에 의해 ‘의도’되고 있었다.

“소설을 읽었을 땐 은교의 캐릭터가 너무 모호했어요. 소설의 은교는 환상 속의 인물 같았죠. 너무나 귀하고 맑고 깨끗해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하지만 시나리오상에 그려진 은교는 밝고 싱그럽고, 젊은 순수의 상징이었어요. 게다가 은교는 또래와도 달랐던 게 내면이 그 나이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웠거든요. ‘연필이 슬프다’는 이적요의 의미를 캐치하려 애쓰고, 그 의미를 이적요와 나누며 공유하죠.”

두 사람의 만남은 이룰 수 없는 남녀 관계의 터부적 욕망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사랑받지 못한 아이와 사랑하고 싶은 노인의 소통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극의 초반부에 집중돼 있는 ‘노인의 부끄러운 욕망’이 욕망으로 끝나지 않은 것도 순수의 본질을 서로 이해했기 때문. ‘알맞은 온도와 습기, 그 안에서의 분위기는 아무에게나 말할 수는 있지만, 아무나 쓸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김고은의 극 중 대사처럼, 진실한 사랑의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은 역시 ‘순수’할 때뿐이다.

21세 나이로 17세 여고생을 연기한 김고은은 오디션 캐스팅에서 익숙하지 않은 외모와 살아 있는 표정 덕분에 신인인 데도 주연 제의를 받았다. 제작진은 전라 연기도 포함돼 있다고 미리 알렸다. “그 말이 너무 무서웠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좋은 배우, 오래 하는 배우가 제 꿈이었는데 노출 연기가 있다고 하니, 걱정이 많이 됐어요. 그때 부모님이 ‘만약 네가 노출이 무서워서 이 작품을 안 한다면, 다음 작품에서도 또 다른 두려움이 널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며 출연에 ‘동의’를 해 주셨어요. 그러고는 작품을 위해 제 자신을 버리기로 결심했어요.”

부끄러움이 많던 그는 5개월의 촬영을 거치며 어린아이 얼굴에서 성인의 얼굴로 변했다는 얘기를 가장 많이 들었다. 그는 “카메라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최대한 솔직하게 연기하려고 했다”며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감정들을 한순간에 모두 표현했기 때문에 부쩍 성숙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는 한 끼도 못 먹었다며 베이글에 치즈를 잔뜩 바른 뒤 입에 쏙 넣고는 생각에 잠겨 대답을 내놓곤 했다. 앳된 티가 드러나는 어린 모습에서도 잠깐씩 은교의 순수함이 교차됐다. 은교의 후유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다.

글 = 김고금평기자 danny@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