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자원봉사단체인 ‘행동하는 양심’ 회원이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쪽방촌에 사는 한 주민에게 쌀을 전달하면서 한가위의 정을 나누고 있다.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아휴 할아버지. 이 먼지들 좀 보세요. 쪽방은 환풍이 잘 안 돼서 청소를 자주 해야 해요. 자 추석맞이 대청소 들어갑니다~.”

새로 들어선 대형 백화점과 쇼핑몰이 늘어선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영등포역 주변. 주말이면 쇼핑객들로 가득 차는 이 거리를 돌아서면 300m가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 평(3.3㎡) 남짓한 쪽방 550여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영등포 쪽방촌’이 나온다.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크기에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다. 비좁고 어두운 도심 빈민가인 이곳에 박모(65) 할아버지의 안식처도 자리를 잡고 있다. 자식들과 연을 끊은 지도 수십년, 지난해에는 부인과 함께 자살을 시도했지만 모진 생명은 끊기도 어려웠다. 추석 명절은 박씨 할아버지의 외로움을 더해 줄 뿐이다.

9일 추석 명절을 맞아 햇살처럼 반가운 얼굴들이 쾨쾨한 냄새가 코를 찌르던 박씨 할아버지의 쪽방 문을 두들겼다. 매주 토요일 오후 3시가 되면 어김없이 쪽방촌을 찾아와 독거노인들을 상대로 방 청소와 목욕 도우미, 밑반찬 배달을 하는 봉사단체 ‘행동하는 양심’의 자원봉사자들이다. 열다섯 명 회원들은 청소팀, 목욕팀, 설거지팀, 밑반찬팀 등 4팀으로 나뉘어 일사불란하게 ‘봉사 분업’에 돌입했다. 목욕팀이 거동이 불편한 독거노인들과 공중목욕탕으로 이동하면 그 사이 청소팀이 방 청소를 하고, 나머지 팀원들은 직접 만든 밑반찬을 도시락통에 담아 독거노인들에게 배달하는 식이다. 이날 봉사단이 준비한 밑반찬은 불고기, 가지조림, 호박전, 열무김치, 배추김치 40인분이었다.

이날 박씨 할아버지의 ‘청소 부대’를 자청하고 나선 이들은 부자(父子) 봉사자 강유성(14)군과 강대우(48)씨, 그리고 구민지(여·20)씨다. 강씨가 먼지가 풀풀 날리는 이불을 걷어 밖으로 나가자 강군은 바닥에 널려 있는 빈병과 쓰레기들을 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구씨는 철 지난 옷들과 언제 사용했는지 알 수 없는 작은 전기밥솥, 고장난 선풍기를 들어낸 뒤 바닥을 쓸고 물걸레질을 했다. 숨이 턱 막히는 쪽방 안에서 땀을 비오듯 쏟던 강씨는 “봉사라는 거창한 생각보다는 이웃이나 친척 어르신댁에 인사 왔다고 생각한다”며 “오늘 우리들의 방문이 어르신들에게 추석 선물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씨 할아버지와 목욕을 다녀온 김진한(34)씨 또한 “8년째 토요일마다 이곳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가족이 명절을 앞두고 함께 묵은 때를 벗기기 위해 목욕탕을 찾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행동하는 양심은 지난 2001년 4월 창립됐다. 현재 전국적으로 회원수가 1만명에 달한다. 온라인을 통해 회원을 모집하고 봉사활동 연락을 주고받는 인터넷 자원봉사 모임이다. 전국적으로 20여개팀이 활동하고 있는 이들은 주로 노숙인과 쪽방 거주자들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주말마다 영등포 쪽방촌을 찾는 이 단체의 홈리스1팀은 이곳 주민들에겐 이웃이자 가족이나 다름없다. 이날 도시락 배달을 하며 독거노인들에게 “또 오겠다”고 명절 인사를 건네던 성원현(27)씨는 “하루는 목욕봉사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한 할아버지가 ‘고맙다’며 우유를 건네 주셨다”며 “이곳 쪽방촌 사람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정’이란 걸 알기에 매주 봉사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쪽방 거주자 김모(74)씨는 “여기 사람들 대부분 가족은 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인연을 끊고 산다”며 “이렇게 찾아 주니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행동하는 양심이 쪽방 주민들에게 살가운 이웃이자 가족이라면 ‘영등포 쪽방상담소’는 이들을 이어 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비영리단체인 쪽방상담소는 영등포 쪽방촌을 비롯한 서울 5대 쪽방촌과 대전, 대구, 부산 지역의 주요 쪽방촌에 상담소를 운영하며 쪽방 거주자들의 기본적인 생활 및 자립과 자활을 돕고 있다.

영등포 쪽방상담소의 이진호 간사는 “쪽방은 노숙인으로 몰락하기 바로 직전의 사람들이 모여 드는 곳”이라며 “기초생활수급자가 대부분인 이곳 거주자들은 정부 지원을 받는다고 하지만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 가면서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들에게 빈곤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것은 바로 외로움”이라고 덧붙였다. 온 가족이 모여 풍성한 음식을 나누는 민족의 명절 한가위에 쪽방촌 사람들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진다. 행동하는 양심 자원봉사자들은 추석 당일인 12일 송편 1만개를 만들어 쪽방 거주자들과 노숙인들에게 나눠 주기로 했다.

오은실(23)씨는 “비록 고향에 가지는 못하지만 가족처럼 대해 주시는 쪽방 어르신들과 함께 추석을 보낼 수 있어 기쁘다”며 “많은 사람들이 가족뿐만 아니라 주변의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풍성한 추석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윤정아기자 jayoon@munhwa.com

이미지 크게보기 ‘행동하는 양심’ 회원들이 쪽방촌 주민들에게 나눠 줄 밑반찬을 담으면서 밝게 웃고 있다. 김낙중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