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시각장애인 이윤동(오른쪽)씨가 지난 15일 울산 남구 신정동 태화강 둔치에서 마라톤 도우미와 함께 달리기 연습을 하고 있다. 울산 = 김호웅기자 diverkim@munhwa.com

아내의 팔을 잡고 조심스레 걸어오는 한 남자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훤칠한 키에 가느다란 다리로 조심스레 한발짝 한발짝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에서 저 남자가 42.195㎞에 달하는 마라톤 풀코스를 106회나 완주했다는 게 상상이 가질 않았다. 작은 장애물 앞에서 아내가 “조심하라”고 말하자, 그는 잇몸까지 활짝 드러내고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걱정 마. 세상에서 가장 밝은 눈을 가진 당신이 내 앞에 있는데 뭘….”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면서도 아내와 함께 웃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윤동(54)씨. 이런 그가 지난 13일 마라톤 풀코스 100회 완주 기념 수필집을 펴냈다.

봄볕이 따사한 지난 15일 오후 울산 남구 신정동 태화강 둔치에서 시각장애인 마라토너 이씨를 만났다. “제가 요즘 출판기념회와 언론사 인터뷰를 많이 해서 바쁘긴 하지만, 오늘 특별히 시간을 냈으니 가능한 한 많이 물어보라”며 농을 건네는 그에게서 구김살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 그에게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왜 시각장애인이 되었느냐”고. “초등학교 시절 칠판의 글씨가 잘 안 보이고 사시증세가 심했는데, 두 눈 중 왼쪽 눈이 조금 잘 보였고, 오른쪽 눈은 바로 앞의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력이 좋지 않았어요. 병원에서는 망막색소변성증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중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장난을 하다 좀 잘 보이던 왼쪽 눈을 다쳐 실명을 하게 되었죠. 이후 2년 동안이나 병원을 쫓아다녔지만, 잃어버린 빛은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이씨가 말을 이었다. “하필이면 잘 보이던 눈을 다쳐 그 후로 학교도 그만두고, 모든 외부와 단절한 채 안방 신세를 지게 되었죠. 내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부모 형제들에게는 골칫덩어리가 될 게 뻔해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었지요.”

그러나 이씨의 절망은 여기까지였다. 18세가 되던 어느 날 서울의 한 시각장애인이 맹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교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4년여의 골방생활을 접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지요. 그나마 글자를 크게 확대하면 겨우 글자를 식별할 수 있는 한쪽 눈을 가진 덕분에 어렵사리 공부를 할 수 있었지요. 덕분에 23세의 나이에 중학교와 대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어요. 그해 바로 대입학력고사를 치러 경북대 사회학과에도 합격을 했지요.”

이씨의 학업에 대한 열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9세의 나이에 시각장애인들의 필수코스로 불리는 부산 맹학교에 들어가 안마와 지압을 배웠다. 3년여 만에 학교를 졸업한 그는 울산에서 조그만 지압물리치료원을 개원하고, 이후에도 틈틈이 공부를 계속, 44세에는 춘해대 사회복지과에 들어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어 45세에는 한자자격 1급시험에 합격하고, 48세에는 울산대 지역개발학과를 졸업했다.

그런 이씨에게 공부보다 더 소중하고 재미있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마라톤이다. 이씨의 마라톤 인생은 지난 2003년 울산시각장애인협회 회장으로 근무할 당시 25명의 회원들의 건강을 다지기 위해 조깅을 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울산마라톤클럽 회원들의 도움을 받아 조깅을 달리기로 바꾸고, 달리기를 마라톤으로 이어간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달렸습니다. 그런데 마라톤을 하면서 느끼는 고통을 참아내고, 42.195㎞를 마치고 골인한 뒤 느끼는 쾌감은 제 인생의 가장 큰 기쁨으로 다가왔습니다. 험난한 제 인생만큼이나 마라톤 코스가 어렵지만, 꼭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고요.”

이 때문에 이씨는 마라톤을 자신의 스승이라고 표현한다. 힘든 오르막이 있으면 편한 내리막도 있다는 게 그의 마라톤 철학이다.

이씨가 달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전국의 장애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기 위해서다. “장애 타령만 하고 마냥 앉아 있으면 계속 장애인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 보였던 일이라도 하고자 덤비니 되더라고요. 많은 장애인들이 제가 마라톤을 완주하는 모습을 보고, ‘앞이 안 보이는 저 사람도 마라톤을 하는데, 나도 하면 되겠구나’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으면 하는 게 저의 작은 바람이죠.”

이씨의 마라톤인생에서 47세에 반려자로 맞이한 아내를 빼놓을 수 없다. 결혼식 바로 다음 날 아내를 진주 마라톤대회에 데려가 함께 하프마라톤 코스를 완주, 아내를 자신의 마라톤 세상으로 끌어들였다. 이후 그가 마라톤 연습을 하는 곳에는 항상 아내가 앞서 손을 잡아주었다. 아내의 마라톤 실력도 늘어 지금까지 하프코스를 6회나 완주하는 기록도 세웠다.

아내 박순옥(55)씨는 “결혼식 다음 날 마라톤을 하는데 정말 힘들어 죽을 것 같았어요. 그래도 남편이 ‘오늘 힘들었던 마라톤을 거울삼아 우리도 인생에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두 손을 꼭 잡고 극복해 나가자’고 말해 앞으로도 계속 남편의 손을 잡고 달리기로 작정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마라톤은 이씨에게 사랑의 참의미를 일깨워주기도 했다. 시각장애인 마라토너인 탓에 이씨의 마라톤코스에는 항상 이씨의 손을 잡고 함께 달려주는 도우미가 있어야 했다. 이들이 없으면 이씨의 마라톤 풀코스 완주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기에 이씨는 자신과 함께 달려주는 도우미들의 손에는 항상 숭고함이 묻어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100여명이 훨씬 넘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손으로 저를 잡아주었지요. 이들이 모두 나의 눈이랍니다. 덕분에 저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눈을 가진 사람이 되었지요.”

이씨는 마라톤을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도 없애는데 이용하고 있다. 이씨는 100회가 넘는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는 동안 수많은 도우미와 마라토너들과 열린 대화를 통해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바꿨다. 처음에는 접근을 머뭇거리던 사람들이 지금은 너도나도 이씨의 손을 잡아주기 위해 나서고, 힘찬 박수를 보낸다.

마라톤에 빠진 그는 지난해 10월17일 마침내 마라톤 풀코스 100회 완주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일반 마라토너들도 하기 힘들다는 100회 완주를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 마라톤에 입문 7년여 만에 달성한 것이다. 그는 이어 지난 3월28일 마라톤 100회 완주를 기념하는 수필집 ‘행복한 마라토너’를 펴냈다. 이 책에는 마라톤을 하면서 느꼈던 고통과 애환, 에피소드 등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씨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숭고한 사랑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책을 펴냈다고 했다.

두 시간여 동안의 인터뷰가 끝난 뒤 이씨는 기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차장까지 길을 좀 안내해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기자에게 “조심하세요. 시각장애인을 인도하다 보면, 비장애인들이 다칠 수 있어요”라며 되레 걱정을 해주었다. 주차장까지 가는 10여분 동안 맞잡은 이씨의 손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울산 = 곽시열기자 sykwak@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