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왕이 요구한 대장경판(大藏經板)은 우리나라에 오직 1본 밖에 없으므로 요청에 응하기 어렵고, 다만 밀교대장경판(密敎大藏經板)과 주화엄경판(註華嚴經板), 한자대장경(漢字大藏經)의 전부를 보내려고 한다.”

1423년(세종 5) 음력 12월 일본 국왕의 사신으로 온 규주(圭籌)와 범령(梵齡)의 해인사 대장경판 요구에 대한 세종의 답변입니다. 나의 조종(祖宗·조상)이 전해주는 것이어서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말도 하지요. 이에 대해, 경판을 요청하는 일본 국왕의 서간을 바친 규주 등은 “한 번 경판을 하사하시면 뒤에는 경판을 청구하는 번거로움이 없을 것”이라며 애걸합니다. 물론 당시 일본 국왕은 천황이 아니라 무로마치(室町) 막부의 제4대 쇼군(將軍)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를 말하지요.

‘세종실록’은 당시 대장경판을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한 임금이 이를 주려 했으나 대신들이 일본의 요구를 일일이 들어주다가 후일 뒷감당을 못할까 염려된다며 건의하는 바람에 무산됐다고 전합니다. 지난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이 하마터면 일본의 소유가 될 뻔했던 순간이지요. 대장경판을 얻지 못한 규주 등은 이듬해 1월 단식농성을 하다 금자(金字)로 쓴 화엄경(華嚴經) 1부를 더 주겠다고 하자 누그러졌습니다.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일본 국왕은 1425년(세종 7) 사신을 보내 대장경판을 다시 요청하지요.

사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 150년 동안 한·일 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일본 측의 수입품이었던 것은 바로 불교 경전, 그중에서도 경전을 집대성한 대장경이었습니다. 고려 말기인 1388년 왜구의 포로 250명을 돌려주는 대가로 대장경을 받은 이래 1539년까지 약 150년 동안 50부 이상의 대장경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하네요.

무라이 쇼스케(村井章介) 일본 도쿄(東京)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450년 무렵까지는 대장경이 일본의 여러 세력들에게 상당히 무원칙하게 증여되다가 15세기 후반이 되면서 조선 측이 가이드 라인을 정해 일본·유구의 양 국왕과 쇼군을 보좌하는 시바(斯波)씨 등의 관령가(管領家), 유력 슈고 다이묘(守護大名)인 오우치(大內)씨 등에게 한정했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상인들이 유구 국왕의 사신을 칭하거나 가공의 나라를 만들어 대장경의 하사를 노리는 일도 일어났다고 하네요. 일본 각지의 사찰에 13세기 판각된 해인사 대장경판을 인쇄한 재조 대장경 외에 11세기에 판각된 초조 대장경 인쇄본이 전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배경 때문입니다.

올해는 1011년(고려 현종 2) 거란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기 위한 초조 대장경 판각이 시작된 지 1000주년이 되는 해이지요. 145년 만에 돌아오는 외규장각 도서와 함께 우리 기록유산의 소중함을 생각하는 한 해가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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