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 말과 소를 맡기기도 하고, 전답을 팔기도 하며, 동쪽이 깨지면 서쪽에서 채우고 채운 곳마다 터져, 빚으로 빚을 갚으니 언제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세세연년(歲歲年年) 언제나 이와 같으면 만가(萬家)의 읍이 겨우 3호(戶)의 촌으로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그치지 않는다면 농부가 거의 없을 것이니, 농부가 어찌 군자를 먹여 살릴 수 있겠습니까?”

1751년(영조 27) 경상도 고성에 살던 월봉(月峰) 구상덕(仇尙德·1706~1761)이 관찰사 조재호에게 올린 장문의 청원서에 나오는 내용은 조선시대 가운데서도 비교적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했으며 문화가 꽃핀 시기로 알려진 영·정조대의 일반적인 모습과는 대조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과거에 실패한 뒤 한평생 고향 마을에 서재(書齋·서당)를 설립해 문생(門生)을 가르치는 한편,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향촌 지식인 구상덕은 20세가 되던 1725년(영조 2) 7월29일부터 사망하기 이틀 전인 1761년(영조 37) 8월25일까지 만 37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한 일기인 ‘승총명록(勝聰明錄·위 사진)’을 남긴 인물이다. 그런데 영조 당시 고성과 통영 지역에서는 해마다 가뭄과 물난리가 반복되고, 거듭된 흉년으로 굶어죽거나 돌림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길가에 즐비하는 등 우리가 지금까지 그려왔던 영·정조 시기의 모습과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게 ‘승총명록’의 특징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김정배·이하 한중연)은 최근 ‘승총명록’에 대한 공동 연구성과물인 ‘승총명록으로 보는 조선후기 향촌 지식인의 생활사’(한중연 출판부)를 발간했다. 전경목·옥영정 한중연 교수와 심영환·박용만 한중연 장서각 선임연구원, 김건우 전주대 교수, 노혜경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등 6명이 모두 5책으로 구성된 ‘승총명록’의 서지학적인 측면부터 일기 내용 분석을 통한 구상덕의 교육 및 농업경영 등 치가(治家) 활동까지 다각도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본관이 창원구씨(昌原仇氏)인 구상덕의 집안은 고성에 정착한 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향촌 내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한 집안이다. 정조 임금이 ‘구씨(具氏)’ 성을 하사해 정조대 이후의 모든 기록에는 ‘구씨(具氏)’로 기록돼 있다. 옥영정 한중연 교수에 따르면 우리나라 각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일기류 자료는 1600여 건에 달하며 이 중 필사본 ‘승총명록’과 같은 생활일기가 반 이상(806건)을 차지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연구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구상덕은 과거에 실패한 뒤 용암서재(龍巖書齋)와 월봉서재(月峰書齋)란 이름의 서당을 건립해 치폐(置廢)를 거듭하면서도 많은 문생들을 배출했다. 특히 구상덕의 문생 중에는 중인이나 평민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특징이다. 이와 관련, 전경목 교수는 ‘서재 경영과 교육활동’이란 글에서 “구상덕의 서재 운영을 통해, 조선후기 지방민들이 각종 질병과 기근 속에서도 교육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구상덕의 일기에는 가리동(佳里洞)서재와 남촌진(南村鎭)서재, 광이(光二)서재, 당동(堂洞)서재, 도선동촌(道善洞村)서재 등 고성 내 각 마을에 있던 서재들이 등장한다. 전 교수는 “바닷가 궁벽한 고을이었던 고성에 이처럼 서재가 자연마을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있었던 것으로 미뤄 볼 때, 조선후기에 경제적으로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양반을 비롯해 중인이나 평민까지도 그들의 자제에 대한 교육적 열망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노혜경 연구사는 ‘농업 경영과 치가(治家)’란 글에서 근면성을 무기로 농업 경영을 기반으로 축적한 잉여물을 토지와 노비 등의 노동력에 투자해 재산을 늘려간 구상덕의 영리활동의 특징을 소개하고 있다.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