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소망? 뭐 있겠어… 굴·조개나 마음껏 캤으면”

이미지 크게보기 30일 인천 옹진군 연평도 갯벌에서 박도화 할머니가 굴을 캐고 있다. 연평도=심만수기자

“새해 소망? 뭐 있겠어. 올 한 해는 저놈의 북한 걱정 안 하고 평화롭게 사는 거지, 굴하고 조개하고 마음대로 따면서 돈 많이 벌 수 있게 우리 주민들 잘 좀 지켜줘.” 지난해 북한의 포격 도발로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나듯 고향 땅을 빠져나가는 등 그 어느 때보다 힘든 한 해를 보냈던 인천 옹진군 연평도 주민들. 섬 전체가 포탄을 맞아 무너지고 찢어진 상태에서 첫 명절인 설을 지내야 하지만 조상께 올리는 차례상 준비를 하는 주민들의 정성스러운 마음가짐은 여느해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명절 덕담을 나누고 윷놀이도 함께하던 이웃사촌들이 대부분 섬을 빠져나가 어느해 설보다 ‘재미없는’ 설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풀이 죽은 주민들이 적지않았다.

30일 연평도의 한 갯벌에서 허리를 90도로 굽힌 채 굴을 캐고 있던 박도화(70) 할머니는 새해 소망을 묻는 질문에 “연평도 주민들이 예전처럼 옹기종기 모여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다”며 “어민들이 마음놓고 ‘만선 풍어’를 누리는 한 해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있겠느냐”고 말했다. 옆에 있던 김영지(62) 할머니는 “외지에 피란가 있는 우리 손자들도 또래 친구들과 이곳에서 다시 학교를 다녔으면 좋겠다”며 “포격으로 인한 피해를 빨리 복구해 예전과 같이 평온한 섬이 됐으면 한다”고 거들었다.

지난해 11월23일 북한의 해안포 포격 도발 이후 주민들이 모두 탈출해 마치 ‘유령 섬’ 같았던 연평도에 신묘년 설을 앞두고 차츰 입도 주민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30일 두 손에 설 선물을 한가득 들고 연평도 선착장에 내린 김모(39)씨는 “설을 맞아 연평도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뵙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며 “새해에는 나라의 안보가 흔들리는 일도, 평화로운 일상의 삶이 위협받는 일도 없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떡국 등 설 음식 준비에 한창인 주부 김모(여·53)씨는 “대부분의 마트가 문을 열지 않아 아이들에게 맛난 설 음식조차 장만해 주지 못할 것 같다”면서도 “뒤숭숭했던 마을 분위기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북 포격 도발로 집이 무너져 한 달 넘게 인천의 찜질방 등 임시 거처에서 피란 생활을 했다는 이모(50)씨는 “할아버지의 산소가 이곳에 있는데 어떻게 고향을 버리겠느냐”며 “올해 설에도 똑같이 음식을 장만하고 차례도 지낼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연평도 주민들은 지난 21일 청해부대가 소말리아 해적 소탕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소식에 안도감과 함께 한껏 기대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연평 면사무소 앞에서 만난 박모(48)씨는 “지난해에는 북한의 추가 포격이 있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는데 이제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면서 “새 학기에는 둘째 아들의 건강이 좋아져 어린이집에 들어가고, 첫째도 초등학교에 입학해 학교 생활을 잘 할 수 있다면 더 큰 바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 군이 소말리아 해적을 소탕한 것처럼 연평도 주민들도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만들어 달라”고 덧붙였다.

연평도에선 포격 도발 이후 복구작업이 벌어지고 있지만 아직도 당시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런 풍경들을 보는 주민들은 긴박했던 당시의 순간을 쉽게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이날 연평도 선착장에서 면사무소로 가는 2차선 해안도로 주변에는 포탄 폭발의 충격으로 방파제 이곳저곳이 10㎝ 깊이로 푹 파여 있는가 하면, 면사무소 주변의 건물 외벽이 불에 그을린 채로 지붕이 내려앉아 있는 등 마을 곳곳이 폐허 그 자체였다.

면사무소 인근에서 만난 주민 김영식(39)씨는 외벽 전체가 무너진 3층짜리 건물을 가리키며 “아직도 포격 당시를 떠올리면 가슴이 뛰고 떨린다”며 “다시는 이런 악몽과도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강한 군대를 만들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옹진군청 특별 복구지원단은 지난달부터 부서진 유리창을 정비하는 1단계 복구작업을 시작해 파손된 창문과 출입문 667개 중 현재 90%가량인 590개를 교체했다. 또 겨울 한파가 풀리는 이달 말부터는 주택과 창고, 근린 생활시설 등 부서진 142채의 건물 지붕을 수리, 교체하는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군청 관계자는 “현재 300여명의 주민이 이곳에 남아 신묘년 설맞이를 준비하고 있다”며 “김포 양곡지구로 피란간 1000여명 등, 마을을 떠났던 주민들이 곧 돌아오면 복구작업에 한층 더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연평도에는 1700여명의 주민 중 4분의 1인 420여명이 들어와 있다. 군청측은 꽃게 조업이 본격화하는 오는 2월말까지는 적어도 100~200여명의 어민들이 더 입도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연평 면사무소의 한 관계자는 “이번 포격으로 집터를 잃은 피해 주민을 위해 우선적으로 임시 주택 39채를 만들어 놨다”며 “봄철 어업 재개 등을 이유로 다시 입도하겠다는 주민들의 의견이 많아 이에 임시 거처도 계속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연평도 = 노기섭기자 mac4g@munhwa.com

이미지 크게보기 연평도 주민들이 포격으로 부서진 집 옆을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