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전무송씨는 “연극배우로서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양면을 지닌 역할에 매력을 느껴 왔다”며 “이제는 어떤 역할이냐보다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고 말했다. 김연수기자 nyskim@munhwa.com

원로 배우 전무송 씨

“뭐, 제가 그런 지면에 나갈 사람이 될까요? 여기 오시려면 멀기도 한데….” 원로배우 전무송(69)씨는 인터뷰를 완곡하게 사양했으나 거듭 요청하자 시간 약속을 잡아 줬다. 지난 16일 수원시 팔달구 경기문화의전당에 있는 경기도립극단 단장실에서 만난 그는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극단 단원들의 얼굴은 상대적으로 어두워서 이상했다.

이날이 마침 그가 그동안 맡고 있던 도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직 임기가 끝나는 날이었다. 그는 홀가분한 마음이라고 했으나, 극단 휴가 기간에도 나와 있던 일부 단원들은 섭섭한 기색이 역력했다.“여기보다는 널찍한 연습실이 낫겠어요. 그리 옮기지요.” 전씨는 극단 연습실에서 인터뷰 사진 촬영에 방해가 되는 기물을 손수 옮기며 바쁘게 움직였다. 연극계의 거장으로 드라마와 영화 쪽에서도 크게 이름을 날린 스타이면서도 소탈한 성품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절로 떠올랐다.

그는 지난 2006년에 경기도립극단을 맡았다. “처음 제의가 왔을 때 고민을 많이 했어요. 배우가 과연 하나의 극단을 이끌어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됐지요. 그런데 여러 선후배와 동지들이 그동안 쌓아온 마음이면 운영해 가지 않겠는가, 라고 격려를 해 주더군요.”

그는 관단체로서의 도립극단이 두 가지 목표를 조화시켜야 한다고 봤다. 연극을 질적으로 발전시키는 것과 관객이 쉽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이는 것. 그는 그것을 지난 4년간 실천하기 위해 애썼다고 자부했다. 자택이 있는 경기 고양시에서 수원까지 매일 출퇴근하면서 젊은 단원들과 동고동락하는 것이 힘들긴 했지만 그만큼 보람도 컸다.

“올해도 두 작품 ‘헬로우 오복성’ ‘행복한 삼복씨’를 만들어 경기도 내 각 시·군을 돌며 공연을 했어요. 뒤의 작품은 전주, 대전 등 다른 도시에서도 무대에 올렸지요. 두 작품은 각기 다문화가정, 장애인들을 소재로 한 것이에요. 편견 없이 더불어 살아가는 게 중요하잖아요. 지금은 과거에 비해 물질적으로 풍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신적으로 중심을 잃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해요. 사회적으로 불미스러운 일이 자꾸 벌어지는 것은 정신적 성찰이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연극을 통해서 그것을 생각하고 느끼게 해 주는 것이 중요해요.”

전씨는 알아듣기 쉽게 말을 하면서도 혹시 자신의 이야기에 어려운 표현이 나온다 싶으면 다시 반복해서 설명했다. 연극배우로서 50여년 가까이 관객들과 직접 소통해 온 내공이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경기도에서 아직 그의 후임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맡아 달라고 할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극단이 한 단계 도약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해요. 능력있는 후배가 맡아야지요. 제가 안양대 공연예술과에 3년째 출강하고 있는데, 이제 학생들에게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아요. 또 본래 하는 일이 배우니까, 연극을 하든지 영화나 드라마를 하든지 열심히 해야지요. 이제 제가 몇 작품을 더하겠어요?”

우리 나이로 올해 70세가 되는 그는 최근 칠순 기념 가족 사진을 찍고 여행도 다녀왔다. “저는 그런 거 안 하려고 했어요. 어른들(부모)도 생존해 계시는데, 좀 그렇잖아요. 그런데 지난 8월1일이 집사람(이기순씨)이 지하철 표를 공짜로 받기 시작한 날이었어요. 자식들이 그것을 빙자해서 아버님도 칠순인데, 사진 한 장 찍고 제주도라도 같이 갑시다, 해서….”

그는 배우로 살아온 것을 후회하진 않지만, 판검사를 기대했던 아버지를 실망시켰다는 미안함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가 1950년대 명문으로 꼽히던 인천중학교에 입학하자 그의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에게 술을 내는 잔치를 벌이며 기뻐했다.

“그런데 제가 중학교에 다니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 집 형편에 대학을 못 갈 것 같더라고요. 그때 길영희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길을 열어 줬어요. 우리나라는 공업이 발전해야 한다는 게 선생님의 말씀이었거든요. 그래서 인천공고 기계과에 진학했어요. 아버지가 공고에 갔다고 꾸중하셔서 3일 동안 집에도 못 들어갔지요.”

공고를 졸업한 후 그는 인천의 한 기계 제작공장에 견습사원으로 입사했으나 곧 그만둔다. “기계를 만들기 위해 깎아 놓은 쇠를 보니 녹이 슬어 있는 게 꼭 제 모습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만두고 방황하기 시작했어요.”

방황의 끝에서 만난 은인이 드라마센터(현 서울예대)의 동랑(東郞) 유치진 선생이다. 1962년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 1기생으로 입학한 그의 재능을 아꼈던 동랑은 1963년 졸업생 공연 ‘춘향전’에서 이도령 역을 그에게 맡겼다. 1964년 극단 드라마센터의 창단 기념작인 ‘마의태자’의 주인공 역도 그였다. 그렇게 촉망받던 그가 군대에 다녀온 후 해럴드 핀터의 극 ‘생일파티’에서 연기를 못한다고 다른 사람과 배역이 바뀌는 굴욕을 당했다. 그는 젊은 결기에 이것을 참지 못하고 연출자에게 항의하며 극단을 뒤집어엎는 소란을 벌였다.

“그 행패를 부린 후에 (당시 센터 소장을 맡고 있던) 유 선생님이 저를 부르시더군요. 아, 이제 쫓겨났구나, 싶더라고요. 선생님께서 말없이 담배를 건네시더군요. 불까지 붙여 주시는데, 피울 수도, 안 피울 수도 없고…. 담배를 빨고 나서 연기를 내뿜지 못하고 있었더니 ‘이놈아, 내뱉어. 폐병 걸려’하셨어요.”

동랑은 고개를 숙인 그에게 “훌륭한 배우가 되려면 먼저 인간이 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연극계에서 주역을 맡았던 인물들을 모두 거론하며 그들 대부분이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하면서 무대에서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너도 그들과 같은 재주를 지녔고 여자도 따르고 술도 잘 마시니 그 짝이 날 수 있다, 그러니 술과 여자를 조심해라, 그래야 진짜 배우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저는 지금도 그게 숙제예요. 어른(동랑)이 바라는 큰 배우가 되지 못한 것은 제가 인간이 되지 못해서가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연극하면서 힘들 때마다 그분의 정신적 가르침을 새기며 견뎠어요.”

그는 1970년 결혼 후에도 마땅한 수입이 없어 아내에게 생계를 맡겨야 했던 시절을 아프게 되돌아봤다. 그의 아내는 피아노 레슨을 하거나 남대문시장에서 옷감 장사를 했고, 광명시에서 양품점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아침에 연극 연습을 하러 나오는데, 집사람이 시집올 때 사 왔던 피아노가 실려 나가더라고요. 그때 연극 대본을 집어던지며 이제부터 나도 장사하겠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아내가 대본을 집어 주며 ‘연극배우 전무송과 결혼했지. 장사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무 소리 않고 대본 들고 집을 나섰어요. 그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그는 혼자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 불이 하나둘 켜지는 서울 시내 집들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남산 소나무를 보며 자신의 이름이 ‘무송(茂松)’이니 언젠가 정이품송처럼 될 것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고 했다.

전씨는 1981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만다라’에서 안성기씨와 함께 주인공 스님 역을 맡아 열연함으로써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임 감독님과 함께 촬영해 보니 엑스트라, 조연들에게까지 깍듯하시더군요.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어요. 연극 쪽에서 유치진, 이해랑, 임영웅 선생님 등이 제 길을 열어 주셨다면, 영화 쪽에서는 임 감독님이 그런 분이시지요.”

‘만다라’로 인기를 얻자, 밤무대 출연 제의가 잇따랐다. 승복을 입고 출연해서 노래를 부르면 큰 돈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메뚜기도 한철이니 인기가 있을 때 한몫 챙기라는 것이 주선자들의 말이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메뚜기가 아니야, 전무송이야.”

그는 이후 브라운관에도 자주 등장, 특히 ‘TV문학관’ 등을 통해 출중한 연기력을 과시했다. 그러면서도 연극 무대를 항상 지켰다.

“유치진 선생님이 연극을 제대로 배워서 민들레 씨앗이 되라고 하셨거든요. 그런 마음으로 지금껏 무대를 대해 왔어요. 기초 예술인 연극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얻은 지명도를 이용해 연극 무대를 활성화시키고자 애썼다. 1990년대 초반에 후배 최종원씨에게 극예술발전연구소(극발연) 창단을 제안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기자는 당시 연극계 간판 스타였던 전무송-최종원 콤비가 만든 연극 ‘북어대가리’를 서울 대학로에서 본 적이 있다. 그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더니 그는 겸연쩍게 웃었다.

“최종원이라는 배우는 친동생과 같아요. 제가 전셋집 이사를 십몇 번 다녔는데, 그때마다 이삿짐을 날라주며 ‘형, 이제 이사 그만 다녀요’ 그랬지요.” 그는 최씨가 정치인으로 변신한 후에 연극인 후배인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갈등을 빚은 것과 관련, “그 친구가 배우가 아닌 일을 하는 것에 대해 걱정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는 데는 정도(正道)가 없으니 인생살이는 다 각자 알아서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면 하는 것이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는 것이지요. 나라 전체에 바른길을 만들기 위한 이야기를 하는 거라면, 그것을 수용하는 마음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앙금이 남아서 ‘너 나한테 이럴 수 있냐’면서 뒤에까지 그러지 말았으면 해요. 양철처럼 뜨거워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인터뷰 = 장재선 문화부 차장 jeijei@munhwa.com

이미지 크게보기 전무송(앞)씨는 1981년작 영화 ‘만다라’에서 안성기씨와 함께 주인공 스님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