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지난 6월26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6·25전쟁에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네덜란드 노병들이 전우들의 묘지에 헌화하고 있다. 부산 = 김동훈기자

“1951년 11월23일, 부산항을 통해 한반도에 첫발을 내디뎠던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겨울바람에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더군요. 곧 눈앞에 펼쳐질 전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장맛비가 내리던 지난 6월26일 오후 부산 남구 대연동의 유엔기념공원. 6·25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37명의 네덜란드 노병들은 이국 땅에서 용맹하게 싸우다 전사한 전우들의 묘지 앞에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기도를 올렸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네덜란드 병사들이 6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참전 중 전사한 유엔군 장병들이 잠들어 있는 이곳은 세계 유일의 이 유엔군 묘지로, 117명의 네덜란드인 장병들이 안장돼 있다.

20대 혈기 왕성한 나이에 이름도 잘 모르는 낯선 나라의 전투에 뛰어들었던 네덜란드 청년들은 이제 머리 희끗한 노인으로 변했다. 하지만 노병들은 60년 전 일어난 전투를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했다.

“함께 총을 들고 싸우던 전우 5명이 제 눈앞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 전우의 묘지 앞에 서서 발을 떼지 못한 채 눈물을 글썽이던 허마너스 우딩가(Hermanus Udinga·81)가 참혹했던 6·25전쟁의 기억을 떠올렸다.

“네덜란드 아른험의 육군부대 판 호이츠연대에 속했던 저는 유엔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21세의 혈기왕성한 청년이었죠. 부산에 도착한 판 호이츠부대는 부산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부산 시가지는 잇따른 패전으로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고 있었습니다. 부산은 중공군의 공격을 피해 몰려든 피난민들로 넘쳐났고 거리는 부모를 잃은 고아들로 가득했습니다. 우리 부대는 기차를 타고 첫 전투를 치를 강원 원주로 곧장 향했습니다. 중공군과 연합군의 접전지였던 그곳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의 전쟁터였습니다. 전쟁의 화마가 쓸고 간 마을은 먼지와 재로 뒤덮인 폐허와 다름없었습니다.”

우딩가는 57㎜ 직사포를 어깨에 메고 동분서주했다. “아군의 위치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 그 무거운 장비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마다 손이 떨려 이를 악물기도 했지요.” 그는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생겨 당시 손톱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전장에서 참혹하게 죽어가던 전우들의 절규가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전쟁의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아 아직도 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지럼증을 느끼곤 합니다.”

흰 국화꽃을 묘비 위에 하나하나 얹으며 회상에 잠긴 노병들의 푸른 눈에서는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허마너스 보가르(Hermannus Bogaar·82)는 “함께 전장을 뛰어다녔던 전우들이 이곳에 묻혀 있지만 난 혼자 이렇게 살아남았다”며 전우들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를 쓰다듬으며 울먹였다. 당시 전사한 덴 오우덴(Den Ouden M.P.A.) 대대장의 비석을 오랫동안 바라보던 레인데르트 보우미스터(Leendert Bouwmeester·84)는 60년 전 대대장의 기억을 떠올렸다. “엄하면서도 한없이 부드러웠던 오우덴 대대장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참전 6개월 만에 전장에서 숨을 거두었지만 천상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1951년 처음 한반도에 발을 디뎠을 당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불과했다”며 “전쟁의 잿더미를 딛고 이렇게 훌륭한 나라를 건설하게 될지는 당시 꿈에도 생각 못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당시 중대장으로 참전했던 레인데르트 스흐뢰더스(Leendert Cornelis. Schreuders·87) 한국전 참전용사회 회장은 “제 수하에 있던 58명의 부하들이 현재 이곳에 묻혀 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스흐뢰더스 회장은 “연합군의 도움으로 나치 치하에서 해방된 네덜란드의 한국전 참전은 당연한 의무였다”며 “전후 급속도의 고도경제성장을 이룬 한국의 발전상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그는 “자유를 선택한 한국민은 지금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북한 주민은 가난과 억압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면서 “아직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생사를 가른 전쟁이 맺어준 인연이었지만 한국에 대한 이들의 애정은 그 누구보다도 각별하고 애틋했다. 방한한 네덜란드 노병들은 지난 3월26일 벌어진 ‘천안함 사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노병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줄 알았다”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수리남인으로 판 호이츠부대에 소속돼 참전했던 프레더릭 아널드 반 러셀(Frederik Arnold van Russel·80)은 “수리남이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네덜란드병으로 한국전에 참여했다”며 “우리의 희생으로 한국이 자유와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돼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러셀은 한국전의 뼈아픈 기억을 잊어가는 한국의 젊은이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표시했다. 그는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란 한국의 젊은이들은 그들의 할아버지 세대들이 참혹한 전쟁을 경험하며 어떻게 한반도를 지키려 했는지 잘 알지 못한다는 기사를 읽었다”며 “전쟁을 온몸으로 경험한 세대가 아직 살아 있는 데도 그 참혹한 역사를 젊은이들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척 슬픈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천안함 침몰은 한국은 여전히 휴전상태이며 한국전쟁이 ‘현재진행 중’임을 알려준 사건”이라며 “전쟁이 끝나지 않은 한 지금의 평화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성 메시지를 전했다.

초기 ‘카투사(KATUSA)’ 요원으로, 판 호이츠 부대에 배속돼 참전했던 곽경찬(78)씨는 이날 60년 전 함께 전장을 누볐던 네덜란드 전우들에게 일일이 고마움을 표시했다.

곽씨는 “접전지였던 강원 횡성과 원주 등지에서 맹활약한 네덜란드 병사들이 없었다면 남하하는 중공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이름도 모르는 작은 나라에 와서 기꺼이 목숨을 걸고 자유를 위해 싸운 네덜란드 전우들에게 우리는 평생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방한한 네덜란드 노병들은 이날 유엔기념공원에서 전우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식을 연 뒤 6박7일의 일정을 마치고 지난 6월28일 귀국길에 올랐다.

부산 = 윤정아기자 jayoo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