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이 “중소기업계는 유럽 경제불안 등 악재를 기업가 정신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김동훈기자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


중소기업은 ‘희망의 용량’이 크다. 민첩함과 창의성이 승부를 결정짓는 21세기 기업 생태계에서 중소기업은 곧 미래다. 김기문(55) 중소기업중앙회장이 최근 화두로 내건 ‘스몰 자이언츠(Small Giants·작은 거인)’
육성도 ‘제5의 물결’을 주도할 중소기업의 역동성을 꿰뚫어본 데서 나온 구상이다. 지난 5월29일 오전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와 한국 경제4단체장 간 간담회를 막 마치고 나온 김 회장을 서울 중구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만났다.


인터뷰 = 예진수 경제산업부 부장대우

그는 세계 시장에서 나래를 활짝 펴는 중소기업이 향후 10년의 한국경제 명운까지 좌우할 것이라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김 회장은 로만손을 글로벌 시계브랜드 업체로 성장시킨 자수성가형 기업인이기도 하다. 숱한 역경과 좌절을 딛고 서느라 그늘이 있을 법도 했다. 하지만 활기찬 표정과 탄탄해 보이는 체격, 말할 때 느껴지는 특유의 솔직성 때문에 그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였다.

개성공단에 대한 계약조건 반드시 이행돼야

우리 정부의 ‘천안함 대응조치’ 발표 이후 기로에 선 개성공단 문제는 중소기업계 최대 현안 중 하나다. 일각에서는 개성공단이 남북간 대결국면에서 하나의 완충지대로 남아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김 회장에게 개성공단 문제를 어떻게 푸는 것이 바람직한지 물어봤다. 사실 중기중앙회장이면서도 개성공단 입주기업 대표 중 한명인 그에게는 민감한 질문이었다.

“개성공단이 말 그대로 특구라면 특구에 대한 계약조건은 반드시 이행돼야 합니다. 우리가 특구인 마산수출자유지역을 만들었을 때 10·26 사태 등 여러 가지 큰 변화를 겪었으면서도 외국의 진출기업들이 하나도 불편하지 않게 이끌어왔지 않습니까. 홍콩이 중국에 선전(深？b) 공단을 처음에 만들었을 때도 중국 난민들이 홍콩으로 넘어오는 등 여러 가지 악조건이 있었지만 공단이 지속적으로 운영돼 중국의 발전 모델이 됐습니다.”

김 회장은 이러한 외국 예를 참고해 개성공단 운영이 지속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개성공단에 노동집약적 기업뿐만 아니라 최근 기술력있는 기업도 많이 들어가 경쟁력을 갖춰가고 있다”며 “정치적 상황과 관계없이 개성공단을 남측 자본과 기술, 북측 노동과 토지를 결합한 공단으로서의 성공모델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 회장의 수첩에는 지난 5월25일부터 27일까지 중국 상하이(上海)엑스포 방문, 29일 원자바오 중국 총리와의 간담회 참석 등 유독 중국관련 일정이 빼곡했다. 그는 “상하이엑스포 현장에서 열린 한국 공연에 많은 중국인이 몰렸고, 대한민국에 대한 중국 내 이미지도 너무 좋다”며 “이런 한국과 중국 간 우호적 분위기를 자꾸 발전시키면 남북관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줄 것”이라고 했다.

“상하이엑스포에 중국 내국인을 빼고는 한국사람이 가장 많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중국쪽 관계자는 ‘한국인이 이번 엑스포에 100만명 정도 방문하면 좋겠다. 그러면 중국인들도 여수 엑스포에 200만명 정도가 방문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세계 129개국 전시부스 중 한국관은 5대 인기관 중 하나입니다. 상하이엑스포 한국관에서 상영된 애니메이션을 만든 회사가 중소기업이라는 점도 인상적이었어요.”

원자바오 총리와 한국 경제4단체장과의 간담회 때 김 회장은 “중국의 신노동법 시행과 조세우대조치 축소 등으로 현지의 한국 중소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중국 정부의 정책적 배려를 주문했다. 중국이 투자 유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현지 진출기업들이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노동법 등을 갑자기 바꿔버리는 바람에 불만이 크다는 것이 김 회장의 지적이다.

글로벌 시장의 강자 ‘스몰 자이언츠’ 육성 제안

화제를 살짝 돌려 시계제조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그에게 중국 짝퉁 시계를 보면 구별할 수 있느냐고 물어봤다. 그는 “중국의 짝퉁은 ABC등급이 있는데, 오리지널과 흡사한 짝퉁도 있다”면서 “전문가는 알지만 비전문가는 깜빡 속아넘어갈 것같다”고 말했다. 중국 짝퉁 상품의 범람과 세계 시계시장의 경쟁 격화에도 불구하고 김 회장이 일군 ‘로만손’ 브랜드는 급성장해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김 회장은 오른팔이 왼팔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길다.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해 30∼40㎏ 되는 시계 샘플 가방을 들고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가 업계에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실제로 김 회장의 대한항공 마일리지만 해도 200만마일이 넘는다. ‘중소기업의 비전은 국내가 아닌 세계에 있다’는 그의 신념은 몸으로 부대끼면서, 어려움을 돌파해온 해외 현장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난 5월14일 청와대에서 열린 ‘전국중소기업인대회’에서 김 회장은 “새로운 10년을 주도할 한국형 중소기업 모델은 글로벌 시장에서 우뚝 설 수 있는 ‘스몰 자이언츠’ 육성”이라고 밝혔다.

“독일은 세계 1위 기술력을 가진 ‘히든 챔피언 기업’이 500개에 이르고, 일본은 100년 이상된 장수기업이 5만개나 됩니다. 한국의 장점은 정보기술(IT) 발전의 토대가 됐던 ‘빨리 빨리’, 다시 말하면 스피드 경영이죠. 독일과 일본의 장점을 믹스하고 한국의 강점을 잘 살려 한국형 스몰 자이언츠를 만드는 것이 치열한 국제경쟁을 뚫고 한국 중소기업이 살아갈 방향입니다.” 그는 “저출산·고령화로 내수 시장은 둔화되는 반면 자유무역협정(FTA) 등으로 글로벌 시장에서의 기회는 확대될 것”이라며 “한국형 스몰 자이언츠는 다각화보다는 본업(핵심사업)을 중심으로 세계시장에서 고속성장을 통해 기업의 가치를 지속하는 중소기업”이라고 정의했다.

금융위기를 거치는 동안 한국경제가 저력을 보인 것과 관련해 “정부 지원의 타이밍이 적절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김 회장은 “무엇보다 현 정부가 잘하고 있는 것은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라며 “정부를 무조건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정부를 대하는 기업의 태도가 무관심에서 관심으로, 불신에서 신뢰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회장이 불합리한 제도 개선을 위해 정부에 대해 쓴소리를 할 때는 현장의 입체적인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적확하게 포인트를 짚는다는 평을 듣고 있다. “지금까지는 중소기업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어서 의견이 집약되지 않았고, 체념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10여년 전에는 ‘내가 만든 제품을 일본, 미국 등에 수출했다’는 것이 중소기업 성공스토리였는데 최근에는 ‘내가 만든 제품이 세계 1위’라는 얘기가 이곳 저곳에서 자주 들립니다. 엄청난 변화입니다.”

중소기업 성장과 함께 대정부 건의 내용도 질적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이전에는 중소기업계의 건의 중에서 자금지원을 해달라는 내용이 많았죠. 중소기업이 급성장한 만큼 지금은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해 달라’, ‘국가경쟁력 향상 측면에서 봤을 때 세금 부담률이 높다’는 식의 본격적인 정책 건의가 주를 이룹니다. 대·중소기업 상생협력과 관련해서 중소기업계가 협약 이행이 제대로 되는지를 놓고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도 커다란 진전입니다.”

대·중소기업간 상생협력 잘 돼야 일자리 창출 효과 극대화

김 회장은 대형유통업체와 중소슈퍼마켓간 상생협력이 잘 돼야 일자리 창출 효과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동네 가게는 식구 3∼4명이 먹고 살기 위한 자그마한 공동체나 마찬가지인데, 그 자체가 사라지면 국가적으로 큰 손해일 뿐만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사회’ 형성에도 악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그는 “세계 어느 나라를 가봐도 대기업이 골목상권까지 파고드는 곳은 없다”며 “법적·제도적 문제를 떠나서 대기업은 사회적 책임차원에서 영세 슈퍼마켓이 밀집한 골목 상권 출점을 자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4월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상임위에서 미약한 수준이지만 기업형슈퍼마켓(SSM) 규제 법안이 통과됐습니다. 하지만 정부 및 여야간 이견으로 법사위에 계류중입니다. 6월 국회에서는 반드시 통과되길 기대합니다. 외국의 한 기업이 시비를 걸어 표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현대차는 중국의 사막화를 막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고, 삼성도 중국에서 몇천명의 중국인에게 백내장 수술을 해주고 있습니다. SSM규제법안에 시비를 거는 외국기업이 우리나라 서민과의 상생은 둘째로 제쳐두고 자기들 영역만 확대하려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대기업에 대해서는 “올 1분기(1∼3월)에 많은 대기업들이 사상 최대 매출, 사상 최대 이익을 냈는데 거기에 납품하는 중소기업들도 그랬느냐는 것을 파악해보면 굉장히 씁쓸한 생각이 든다”며 “중소기업도 뭔가 남아야 기술개발도 하고 고용창출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이 최근 한 중소상공인으로부터 들었다는 이야기는 대기업에 치이는 영세상공인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충청도 시골에서 올라와 인천에서 슈퍼마켓을 했는데 장사가 잘 됐대요. 계약기간이 돼 건물주와 재계약을 하려는데 건물주가 매년 5% 정도 올리던 가게세를 갑자기 두 배로 올려달라고 했답니다. 할 수 없이 옆쪽으로 이사를 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에 자기 대신 들어간 대기업 SSM 쪽에서 ‘가게세를 두배로 올려줄 테니 나에게 임대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상인이 ‘SSM의 일일세일 공세 등으로 인근 가게들은 쥐도새도 모르게 싹 없어졌다’고 울면서 하소연하는데, 마치 내가 당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전통 중소기업 기반이 튼튼해야 벤처도 발전

김 회장은 “매출 1000억이 넘는 국내 IT 및 벤처기업을 보면 70%가량이 전통 중소기업에서 시작해 IT 벤처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며 “중소기업과 제조업 기반이 얼마나 튼튼한지가 그 나라 경쟁력의 척도”라고 역설했다. 중소기업 구조조정도 화급한 과제. 김 회장은 “구조조정은 필요하며, 정상적 시장에서는 적절하게 문을 닫는 기업도 있어야 선순환이 되는 측면도 있다”며 “하지만 지금 당장 적자가 나지만 미래 경쟁력이 있는 기업까지 퇴출되면 기업도 국가도 손해이므로 이를 잘 선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이 스스로 경쟁력을 키우는 가운데 대기업의 진정성 있는 동반성장 전략, 중소기업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정부의 제도 만들기 등 3박자가 척척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게 김 회장의 지론이다. 그는 “한국경제의 뼈대인 중소기업이 속이 꽉 찬 알짜기업으로 재탄생해야 ‘한국경제의 골다공증’과 조로화를 동시에 막을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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