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나는 중학생 때부터 연예활동을 하며 늘 바쁘게 살아왔기 때문에 친구, 친지들과 한가하게 놀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래서 어렸을 적 설날에 사촌 형제들과 즐겁게 어울렸던 추억이 너무도 소중하다.

초등학생 때 설날이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신 큰댁(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갔다. 큰댁에는 사촌들이 예닐곱명 모였다. 아버지 형제(3남1녀)들의 자손인 우리들은 대학생부터 유치원 꼬맹이까지 나이는 제각각이었지만 우애가 두터웠다. 어린 축이었던 나는 언니들과 한방에서 이야기하고 노래하며 놀았다. 큰아버지의 둘째딸이었던 기숙이 언니는 당시 인기 가수였던 송창식의 노래들을 멋들어지게 불렀다. 나는 기숙이 언니 노래가 끝나면 “한 곡만 더, 한 곡만 더”하며 졸랐다.

중학생이 되면서 설날이 돼도 큰댁에 가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 내 연기활동을 반대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께서 “우리 집안에서 광대가 나올 수 없다”며 역정을 내셨다는 말을 전해듣고, 어린 마음에 무척 섭섭했다. 손녀가 하는 일을 칭찬해주지는 못하실 망정 그렇게 반대하시다니…. 지금과 달리 당시엔 연예인을 천시하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자격지심으로 더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계신 큰댁에 발길을 끊었다. 아버지, 언니, 남동생은 설날 세배를 위해 큰댁에 갔지만, 나와 엄마는 가지 않았다.

고교에 들어간 후에 다시 설날에 할아버지를 뵈러 가게 됐다. 할아버지께서 당신과 막역한 친구였던 탤런트 김혜자 선생님의 부친과 “우리 손녀가 당신 딸보다 연기를 더 잘 한다”며 장난스럽게 말다툼을 하셨다는 것을 듣게 됐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손녀의 연예활동을 인정해주셨다는 생각으로 흐뭇했다.

‘하이틴 스타’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나는 사촌들 사이에서도 인기였다. 배우 아무개는 진짜로 그렇게 잘 생겼냐? 가수 아무개는 성격이 어떠냐? 사촌들이 이렇게 물어보면, 나는 이러쿵저러쿵 잘난 체하며 이야기를 했다. 사촌들은 그런 나를 무척 예뻐하며 귀를 기울여줬다.

내가 대학생 때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돌아가셨다. 이후엔 설날에도 사촌들과 만날 기회가 없었다. 결혼을 한 이후엔 직계 가족들 챙기기도 힘들어졌다.

최근 몇 년간 설날이면 부모님을 우리 집으로 모셔서 함께 지낸다. 학업에 바쁜 올케(남동생의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나의 유일한 정성이라고나 할까.

지금은 사촌들이 어떻게 사는지조차 잘 모르지만, 순수했던 어린 시절 설날에 함께 어울렸던 기억은 늘 따뜻한 느낌으로 되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