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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내게 설은 낯설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설 때면 동네아이들은 새 운동화에 때때옷 입고 세뱃돈 받은 것을 자랑했지만 나와 동생은 풀이 죽어 있었다. 6·25전쟁 때 헤어진 아버지는 소식이 없고 외동딸인 엄마는 부모님이 안 계셨다. 명절 때면 우리 형제를 데리고 엄마의 큰아버지 댁으로 갔었다. 친손녀나 외손자들은 맘껏 떠들며 어리광도 부리고 투정도 했지만 동생과 나는 구석진 골방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면 엄마는 숯불에 구워낸 갈비나 불고기를 가지고 왔고 우린 배고픈 제비새끼들처럼 받아 먹었다. 어찌나 맛이 있던지 목에 꽉 차도록 삼켜도 더 먹고 싶었다. 세배할 때도 친할아버지나 친외삼촌이 아니어서인지 쭈뼛거리고 엉거주춤했다. 공돈이 제법 생겼는데도 신나지 않고 뭔가 허전했던 것이 잊어지지 않는다.

방송국에서 활동하던 젊은 시절도 너무 바빠서 설에 대한 기억은 그냥 그렇다. 1970, 1980년대엔 설 특선 외화 녹음이 참 많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벤허’‘자이안트’‘ 왕중왕’ 같은 대작들은 서너 시간씩 녹음했다. 설날엔 차례만 지내고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곤 했다. 딸아이들이 어딘가 가자고 졸라댔다. 내가 사정했다. 어깨 주물러달라, 허리 밟아달라고. 고사리손으로 조몰락거리며 아이들끼리 키득거리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달콤했다.

40대엔 송도순씨와 교통방송 MC로 명절엔 아예 고속도로 이동스튜디오에 가서 생방송을 했다. 고향 가는 길, 서울 올라오는 길 특별 방송을 4~5일씩 하다 보면 명절이 지나가곤 했다. 그러기를 17년이나 했으니 처가 어른들께도 사위 노릇을 제대로 못했다. 가장이 없으니까 명절에 우리 집은 쓸쓸하고 허전했다고 집사람이 말하곤 한다.

어린 시절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렸기에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상당히 강했다. 열심히 일해서 자식들 잘 먹이고 공부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놀아주기 싫은 것이 아니고 지치도록 일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그것이 지혜롭지 못한 생각이라는 것을 그때는 깨닫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명절 때 조상과 부모의 존재감 그리고 친척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고 명절의 의미를 자연스레 담아주어야 했었다.

요즘엔 아이들이 나와 놀아주지(?) 않는다. 뭐가 그리 바쁜지 다 따로따로다. 한동안은 차례상에 올려진 사진 속의 아버지를 보며 당신은 제게 왜 가난을 물려주셨습니까 하고 따지듯 물어댔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버지를 편하게 해드리자고 다짐했다. 올 설에도 절을 올리며 말씀 드릴 것이다.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목소리의 유산은 위대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