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산이 많죠. 우선 아우토반같은 고속도로를 닦으십시오. 그 동맥을 질주할 자동차산업도 필요합니다. 자동차산업은 고용창출과 국가 세수에 큰 도움이 됩니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합니다. 제철산업을 하십시오. 석유화학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수출을 위해서는 선박회사도 만들어야 합니다.”

1964년 12월9일, 서독 본에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손을 꼭 잡으면서 경제 지원 약속과 함께 이같이 조언했다. 그리고 일본과도 손잡을 것을 주문했다. 그는 박 대통령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자 독일과 프랑스의 예를 들었다.

“독일과 프랑스는 역사상 42번 전쟁을 했소. 그러나 지난해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와 샤를 드골 대통령이 악수를 하면서 이웃 나라가 됐소. 독일은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한번도 진 적이 없으나 전쟁에서 이긴 적은 한번도 없소. 지도자는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가야 합니다.”

독일과 한국은 ‘서로 고마운 나라’다. 한국에 있어 독일은 특히 더 그렇다. 1964년 한국에 돈을 빌려주겠다는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박 대통령은 독일 방문 직전 미국을 방문,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차관 지원을 요청했다가 보기좋게 거절당했다. 그런 상황에서 독일은 3500만달러를 빌려주고, 경제고문단까지 파견해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나라인가.

이유가 뭘까. 첫째,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역할이 컸다. 당시 이들의 성실성은 독일 언론에 부각됐다. 박 대통령이 초청받은 것은 언론에 파독 간호사들이 ‘살아 있는 천사’로 비유된 것이 계기가 됐다. 둘째, 독일 역시 한국이 고마운 나라였다. 한국 덕분으로 폐허 위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합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다시는 전쟁을 꿈꾸지 못하도록 아예 초토화시켰다 한다. 그러나 미·소 냉전시대가 도래하면서 미국은 서독을 재건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것이 바로 ‘마셜플랜’이다. 마셜플랜은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미국의 서유럽 16개 나라에 대한 대외원조계획이다. 미국은 3년에 걸쳐 120억달러를 지원했다. 서독에 상당부분 지원됐음은 물론이다. 특히 1950년 한국전쟁은 서독에 ‘천우신조’의 기회가 됐다. 서독은 군수무기 수출 특수를 누리게 됐고, 그 결과 경제 재건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한국이 없었다면 오늘날 독일도 없다. 셋째, 일제 때 독일로 유학 간 이미륵 박사가 끼친 영향이 컸다. 파독 간호사·광부 역시 그의 후광이다. 박 대통령의 통역을 맡았던 백영훈 박사에 따르면 독일의 유명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그의 얘기를 하곤 했다. 한마디로 ‘한국=이미륵’이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륵 박사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가 독일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넷째, 분단국가라는 동병상련도 한몫했다.

박 대통령은 에르하르트 총리의 조언을 잊지 않았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1965년 한·일수교는 물론 자동차, 철강, 조선, 정유산업 등을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그리고 오늘날 이들 산업은 대한민국의 얼굴이 됐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는 일본의 역할도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에르하르트의 충고가 거의 완벽하게 적중한 셈이다.

독일의 교훈은 계속되고 있다. 1989년 통일에 대한 전범도 보여줬고, 최근에는 수도 이전의 실패 작품까지 가르쳐주고 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는 최근 한국을 방문, 독일의 수도 복귀론을 거론하며 “독일의 교훈을 잊지 말라”고 했다. 독일은 또 이웃 나라와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지난달 11일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파리의 개선문에서 열린 ‘1차 세계대전 종전 91주년 기념’행사에 참석, 불가침을 다짐하며 ‘영원하라 프랑스, 영원하라 독일, 영원하라 프랑스와 독일의 우정’을 외쳤다.

일본 역시 독일과 마찬가지로 마셜플랜과 한국전쟁의 수혜국이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은 아직 독일과 프랑스와 같은 관계로는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한·일 역시 한·독처럼 ‘서로 고마운 나라’로 발전하길 기대한다.

[[오창규 /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