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사진=심만수기자

‘다른 건 다 되지만 자식과 골프만은 뜻대로 안 된다’는 말이 있다. 골프를 접해본 사람이면 흔히 하는 하소연(?)이다. 그런데 절대 되지 않을 일을 ‘아들’을 통해 단 한 번에 해결(?)한 사람이 있다. 예전에 ‘국경과 이념을 넘은 사랑’으로 올림픽 메달리스트 이상으로 더 유명했던 안재형(44) 전 대한항공 탁구팀 감독이다.

그의 아들인 안병훈(18)이 8월 31일 제109회 US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에서우승했다. 9월 17일에 18번째 생일을 맞는 안병훈은 지난해 대니 리(19·한국명 이진명)가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34·미국)의 종전기록을경신하며 세운 대회 최연소 우승 기록(18세 1개월)을 1년 만에 다시 갈아 치워 ‘세계적 골프 신동’이 됐다. 안병훈의 US 아마추어 챔피언십 우승은 ‘최연소 기록’뿐아니라 대니 리가 뉴질랜드 국적으로 우승한 것을 감안하면 대회가 창설된 이후 한국은 물론 아시아 국적 선수로서는 정상에 오른 첫 번째 주인공으로 더욱 의미가 크다. 여기에 그의 아버지 어머니가 당시(1989년)로서는 ‘세기적 결혼’을 한 안재형-자오즈민 커플이었기에 또 다른 화제가 됐다.

아들의 우승 축하 전화통화에 “당분간은 한국에 들어 갈 수 없을 같다”던 안재형 전 감독이 10일 갑작스레 입국했다. 그는 이른 귀국에 대해 “로리 맥길로이(북아일랜드), 이시카와 료(일본), 이진명 등이 모두 나온다는 소리를 듣고 출전을 결심했다. 병훈이가 학교 수업을 많이 빠지게 돼 처음엔 망설였지만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젊은 선수들이 출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병훈이에게는 수업보다도 더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는 “솔직히 빨리 아들 자랑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국오픈 1라운드가 열린 10일 충남 천안 우정힐스골프장에서 그를 만났다.

그도 ‘골프 대디’다. 한국의 프로골퍼 부모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도 직접 아들의 캐디백을 메고 다닌다. 더욱이 운동을 한 그였기에 코치까지 한다. 경기를 치른 아들보다 더 힘겨운 모습으로 마지막 홀을 나오는 그에게 ‘맹부삼천지교가 따로 없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도 “내가 맡은 선수라면 이렇게는 못했을 겁니다. 아들이니까 힘든 줄 모르고 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캐디로 처음 나섰을 때는 정말 정신이 없었습니다. 원하는 클럽을 빼주기 바쁘고, 그러다보면 수건을 건네주는 것도 잊어버리고 지나치면 병훈이가 ‘아빠 지금 뭐해’라고 하면 정신이 번쩍 들곤 했죠. 이제는 어느 정도 전문 캐디 수준이 됐습니다. 운동을 했기에 체력적으로 자신이 있고요.” 그래도 2년여 동안 캐디백을 메고 다디나 보니 그의 오른쪽 어깨에는 굳은 살이 박여 있었다.

그가 아들의 캐디로 나선 것은 2년전 부터다. 그는 좀 더 체계적으로 골프를 가르치기 위해 2005년 미국 플로리다주로 아들을 유학 보냈다. 그러고는 사춘기의 아들이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자 2007년엔 아예 대한항공 탁구 감독직을 버리고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무슨 일을 하건 대충 해선 성공할 수 없다는 게 제 신조입니다. 아들을 위해선 아마 더한 일도 했을 겁니다. 탁구감독직을 그만둘 때가 제일 힘들었는데 그냥 놔두면 아들의 성공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과감하게 일을 저질렀죠.”

현역시절 누구보다 승부욕이 강했고, 지도자로서도 원칙에 철저했던 안 감독이었기에 ‘병훈이도 그렇게 키우고 지도한것 아니냐’고 물었다.

“병훈이가 저를 감독으로 생각하지 않는데 무슨 지도를 합니까. 아이가 나와 함께 경기를 하는것이 편하다고 하니까 따라다니는 거죠. 탁구라면 모를까 골프의 기술적인 것은 병훈이보다 모르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절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운동을 했고, 선수들을 가르쳐 왔기에 경기에 임하는 자세, 어려운 상황에 접했을 때 정신적인 자세에 대해 조언을 해 줄 뿐이죠.”

그래도 유명 탁구선수였고, 지도자 생활을 했기에 ‘탁구 선수를 지도하는 것과 아들을 가르치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어렵냐’고 물었다. 그는 웃으며 “병훈이가 나를 감독으로 생각하지 않기에 예전에 선수들을 지도할 때와 비교할 수 없죠. 그러나 병훈이가 경기를 하면서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 특히 퍼팅이 되지 않을 때 타이거 우즈처럼 간혹 골프채를 땅에 치기도 하고 던지기도 해요. 그럴 때는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물론 경기 후 그런 것을 극복해야 하고, 화를 참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얼마나 힘들고, 화가 나면 그럴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솔직히 다른 선수들이라면 같이 소리를 버럭 지르고 풀어버릴 일이지만 아들이라서 더 힘들어요”라고 ‘아비의 속내’를 털어 놓았다. 아빠가 탁구를 하고, 더욱이 엄마까지 세계적 탁구선수였는데 골프를 시킨것이 궁금했다.

“처음에 ‘놀이’로 운동을 접하게 하면서 탁구, 축구, 야구 등 모두 시켜봤는데, 조금 둔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스피드나 감각적인 운동은 좀 어렵겠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탁구는 내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선수를 시키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탁구선수는 생명이 짧아요. 체력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할 수 없는 운동이죠. 그런면에서 골프는 오랫동안 즐기며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권했죠. 하지만 나도 접해 보니 골프라는 운동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더군요. 체력적으로도 그렇고, 특히 정신적인 면에서 정말 힘든 운동이에요.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일반인들이 골프를 너무 쉽게 본다는 것입니다. 특히 퍼팅 같은 경우 아주 쉬울 것같은 것을 놓쳤을때 받는 스트레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죠. 지금 생각하면 탁구가 가장 힘든 운동인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안 감독은 아들의 평가에 대해서 냉정하다. 지난 US오픈에서의 아들의 우승은 좀 이른 감이 있고, 이번 우승이 자칫 독(毒)이 될 수도 있다며 혹여 생길 아들의 자만심을 경계한다. 그와 아내를 빼닮은 아들의 승부근성이 우승의 원동력이면서도 그 반대로 독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는 “병훈이는 의욕이 너무 강해요. 이는 좋은 성적을 내는 데 밑거름이 될 수 있지만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때는 심리적으로 자제가 되지 않아 샷이 무너지는원인이 될 수 있지요. 18홀을 치는 동안 자신을 컨트롤하지 않으면 오히려 경기를 망칠 수 있어요”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경기 내용을 분석하는 대화를 나누면서 가끔 편지를 써 아들의 감정을 조절하는 데도 신경 쓴다고 한다. 그는 골프도 탁구 못지않은 ‘멘탈 게임’이라며 정신력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안병훈의 강점인 장타력도 ‘양날의 칼’이라는 분석이다. 안병훈은 186㎝, 96㎏의 건장한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드라이브 샷 평균 거리가 290~300야드에 이를 정도의 파워를 자랑한다. 하지만 안 감독은 “장타는 똑바로 날아가면 다른 선수들보다 유리한 게 사실이지만 조금이라도 부정확했을 때는 단타를 치는 경쟁자들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일 수 있어요. 정교함을 보완해야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아들의 진로에 대해 “사실 지금부터가 고민입니다. 두 갈래 길이 있다고 봅니다. 지금부터 프로에 입문, 잡초처럼 스스로 경쟁해 정상에 오르는 것과 그렇지 않고 아마추어에서 더 실력을 다져가면서 톱의 자리에서 프로로 턴을 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병훈이가 공부도 해야 하기 때문에 1,2년 더 보고 결정할 생각입니다. 1년여 앞서 US오픈에서 우승한 이진명의 경우가 병훈이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진명와 일찍 프로에 뛰어든 노승렬의 아버지에게서 많은 조언을 듣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골프 실력은 90대 초반의 보기플레이어다. 드라이버샷 거리는 아들보다 50야드 이상 뒤처지는 240야드 정도로 베스트스코어가 82타라고 밝힌 안 감독은 “골프는 치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정말 쉽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타이거 우즈의 뒤에는 아버지 얼 우즈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골프 황제’가 있듯 ‘아빠 캐디’안재형씨가 있는한 조만간 PGA무대에서 안병훈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체육부장 kj59@munhwa.com

이미지 크게보기 10일 천안 우정힐스골프장에서 열린 한국오픈 1라운드 9번홀에서 안재형(왼쪽)이 아들 병훈에게 볼을 건네주고 있다. 심만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