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황영조(왼쪽 네번째), 이은철(왼쪽 두번째), 김화복(왼쪽 세번째), 지경희(맨 오른쪽)씨 등 ‘함사모’ 회원들이 29일 오전 서울 강남구 개포동 하상장애인복지관에서 자장면 면발을 뽑고 있다. 김선규기자

“자장면 반죽이랑 춘장부터 옮기고, 면 뽑는 기계는 조심히 내려야 돼.”

지난 8월29일 오전 11시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하상장애인복지관. 낯익은 스포츠 스타들이 트럭에 싣고 온 자장면 재료를 나르고 있었다.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39), 1980년대를 주름잡은 복싱스타 장정구(46), 1992년 사격 금메달리스트 이은철(42), 여자배구의 ‘거포’ 지경희(42), 아시안게임 높이뛰기에서 금메달을 땄던 이진택(37), 왕년의 배구스타 김화복(52)씨 등 스포츠 영웅들이 짐수레를 끌고 보자기를 손에 들었다.

이날은 ‘함께하는 사람들’(회장 장윤창, 함사모)이 특기인 자장면 나눔 봉사를 하는 날. 복지관 주변은 2000가구 규모의 영구임대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여 있다. 이 중 900가구가 장애인 가구다.

‘함사모’는 지난 1998년 결성 이후 매달 1회 이상 장애인과 노인 등 사회의 소외된 이웃에게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복지관 지하에 위치한 식당에 식재료와 버너, 면기계 등 기구를 모두 나르고, 스포츠 스타와 일반인 봉사자들로 이뤄진 15명 남짓한 봉사자들이 모두 모이자 음식 준비가 바로 시작됐다.

미리 준비해온 춘장 소스를 데우고 밀가루 반죽을 면기계에 넣자 새하얀 고무줄 같은 자장면 면발이 여러 갈래로 쏟아져 나왔다. 황영조씨가 기계에서 나온 면을 솥에 넣어 끓였고, 다른 봉사자가 끓는 물에 다 익은 면을 체로 건져 찬물에 담갔다. 이렇게 완성된 면을 그릇에 담고 이진택씨가 춘장을 얹었다. 자장면이 완성되고 향긋한 춘장 냄새가 식당 밖에까지 퍼지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눈이 안보여 옆사람에게 의지한 사람, 보청기를 낀 백발이 성성한 청각장애인 부부, 40대 중반의 뇌성마비 환자, 다리를 절며 걷는 사람 등이 ‘자장면 호사’를 누리기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식당에 들어섰다. 이은철, 지경희, 김화복씨 등이 자장면과 단무지 등을 내오기 시작하자 식당은 시장처럼 시끌벅적해졌다.

“여기 네 그릇 주세요.” “단무지 더 주세요.” “여기 두 그릇 더 있어요.”

여기저기서 자장면을 달라는 소리와 자장면을 먹으며 사람들이 외치는 행복한 대화들이 식당 안을 가득 메웠다. 뇌성마비 3급 판정을 받은 박태진(47·서울 서초구 양재동)씨는 “바로 만들어주니 이렇게 맛있을 수 없다”면서 자장면을 여섯 그릇이나 비웠다. 청각장애 4급인 조일순(75·개포동) 할머니는 “평소에 못 먹던 자장면을 만들어 주니까 좋다”며 한 그릇을 맛있게 비웠다. 조 할머니는 허리가 불편해 요대를 차고 왔다. 35세에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은 이인창(60·개포동)씨의 자장면은 장정구씨가 가위로 잘라주고 젓가락으로 비벼줬다. 이씨는 “장정구 선수처럼 대단한 사람이 자장면을 잘라줘 감사하다. 자장면 맛이 일반 중국집 음식과 비교해도 손색없다”면서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날 장애인들에게 최고의 인기스타는 황영조씨였다. 사람들은 식당 한쪽에서 단무지를 나눠주고 있는 황씨에게 와서 악수를 청하거나 사인을 받아갔다. 어떤 사람은 디지털카메라를 가져와 함께 사진을 찍자고 청하기도 했다. 운동을 그만둔 후 살이 붙은 황씨에게 “살쪘네”라며 ‘살가운’ 알은체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황씨는 “살면서 남을 위해 일을 할 기회가 많지 않은데 봉사활동을 하며 보람을 많이 느낀다”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만나면서 내 몸이 건강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봉사는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적은 돈과 시간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며 “앞으로는 자장면 봉사 외에도 스포츠 봉사로 장애인들이 체육을 통해서도 즐거움과 만족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고 봉사계획을 밝혔다.

학창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국제파’ 이은철씨는 “봉사가 삶의 목표”라는 말을 했다. 이씨는 “중학교에서 대학교까지 미국에서 지내며 봉사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한 나로서는 봉사가 친숙하다”면서 “봉사가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것보다 더 재미있다”고 ‘봉사 예찬론’을 펴기도 했다. 통신기기 사업을 하는 이씨는 “사업을 하는 이유도 봉사하기 위한 것”이라며 “돈이 모이면 봉사재단을 만들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봉사시간 내내 식당을 돌면서 가위로 면을 잘라주고 손이 불편한 사람에겐 직접 자장면을 비벼준 장씨는 “자장면 자르기와 비비기는 내 ‘전공’”이라며 뿌듯해 했다. 장씨는 “형편이 어렵고 몸이 불편한 분들이 우리가 만들어준 자장면을 드시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분들에게 봉사하면서 우리가 사회의 어두운 곳을 돕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날로 ‘함사모’에 두번째로 참가한다는 지경희씨는 “봉사를 하면서 평소 만나기 힘든 장애인을 만나면서 느끼는 점이 많다. 스포츠를 지도하는 일은 내가 아는 일을 그냥 전달만 하면 되지만 장애인 봉사는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일이다. 앞으로도 봉사활동을 지속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날 준비한 300인분의 자장면은 약 1시간 만에 완전히 동이 났다. 찾아온 사람들 중 상당수가 두 그릇 이상을 먹었다. 이날 봉사활동에서 ‘함사모’가 나누어 준 것은 자장면만이 아니었다. ‘함사모’는 사랑과 희망도 함께 나누었다. 이들이 나눈 사랑과 희망 덕분인지 자장면을 먹고 돌아서는 장애인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함박웃음이 퍼지고 있었다.

이화종기자 hiromats@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