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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기행’,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잘 알려진 서경식(현대법학부) 도쿄게이자이대 교수가 서양근대 미술기행을 ‘고뇌의 원근법’(박소현 옮김·돌베개)이란 제목의 책으로 냈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이란 제목의 미술 기행문에 이어 국내에 소개되는 세 번째 미술기행 책이다. 이미 전작에서 그랬듯이 이번 기행에서도 선정 작가가 독특하다. 에밀 놀데, 오토 딕스, 에른스트 키르히너, 펠릭스 누스바움, 조지 그로스, 다니엘 에르난데스 살리사르, 존 하트필드, 케테 콜비츠, 고흐 중에서 교과서적인 작가는 고흐 정도에 그친다.

저자에게 미의식은 ‘잘 그렸다’거나 ‘예쁜 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아니다. 그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얼마나 절실한 그림인가’, 혹은 ‘얼마나 치열한 그림인가’다. 중요한 것은 대상의 본질을 응시하는 힘이다. 책에서 제1차세계대전을 경험한 뒤 다시 전운이 감돌던 독일 바이마르 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다룬 이유다. 그에 따르면 인간들의 삶이 고뇌로 가득할 때는 고뇌가 미술에 투영돼야 한다. 추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이 작품 속에서도 추한 것이 맞다.

대표적인 작품이 저자가 1976년 교토의 전시회에서 처음 접한 뒤 충격을 받았다고 전하는 오토 딕스의 ‘늙은 연인들’이다. 이 작품은 ‘사랑’을 둘러싼 미사여구를 허락하지 않는다. ‘노인에게도 사랑이 있다’거나 ‘서로 사랑하는 이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모두 아름답다’는 위선도 잔혹하고 철저하게 파괴한다. 그렇게 추한 그림이면서도 추하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 이상한 힘을 가진 작품.

오토 딕스가 1차대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4년의 시간을 들여 완성한 ‘전쟁제단화’는 더욱 적나라하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할 제단화의 중앙에는 포탄을 맞고 찢어진 병사의 시체가 철책에 걸린 채 부패해간다. 그가 전쟁과 폭력이 판치던 시대에 그린 그림에는 천국이 아닌, 인간의 타락이 극에 이른 지옥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런 기행에 고흐의 작품이 포함된 것 역시 고뇌를 응시하는 힘 때문이다.

‘증언으로서의 예술’을 찾으며 적은 책은 낭만적인 에세이와도 거리가 멀다. 오히려 아우슈비츠에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뒤 끝내 자살로 삶을 마감한 프리모 레비를 찾으며 쓴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읽는 것 못지않게 담담하면서도 아프다. 그러면서 아직도 편하고 예쁜 것들이 대세인 우리 미술계를 돌아보게 한다.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