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임정현기자

“누군가 말했듯이 국가대표 감독이란 자리가 ‘독이 든 성배’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대표팀 감독으로는 하루가 지났는데 정말 힘드네요.”

한국 남자농구대표팀 사령탑에 오른 허재(44·사진) 감독은 며칠 전 2008~2009시즌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한 KCC 감독으로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농구대표팀의 첫 훈련이 있었던 14일 오후 경기 용인시 마북리에 위치한 KCC체육관에서 다시 만난 허 감독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당초 허 감독을 만나고자 했던 것은 지난번 못다한 ‘KCC 우승’얘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난 1일 KCC가 챔피언결정 7차전에서 삼성을 꺾고 우승한 직후 대한농구협회는 허재 감독을 국가대표 감독으로 선임, 발표했다. 그러곤 13일 대표팀을 소집, 8월 동아시아선수권대회 준비에 들어갔다. KCC 우승 감독으로서의 인터뷰는 지나간 얘기가 돼 버린 것이다.

그도 만나자마자 대표팀 얘기로 인사를 대신했다. 인터뷰 도중에도 허 감독의 휴대전화는 계속 울려댔다. 소속 선수의 합류를 늦출 수 없겠느냐는 한 프로팀 감독의 전화였다고 소개했다.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은 그는 “예전에는 어떻게든 대표팀에 들어가려고 로비를 했는데 이제는 빼달라고 로비를 하는 세상이 됐다”며 프로구단과 선수들의 ‘태극마크’에 대해 달라진 세태를 안타까워했다.

지난 13일 농구국가대표 소집 첫날 12명의 선수 가운데 절반 이상이 부상을 호소했다. 일부 선수들은 대표팀 합류가 어렵다고 진단서까지 가지고 나타났다. 하승진은 아예 깁스를 했다.

달라진 세태(?)에 섭섭해하면서도 그는 ‘선수들을 이해한다’고 했다. 허 감독은 “6개월간 프로리그를 뛴 선수들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내가 무리한 것을 요구할 수는 없어 대표팀 훈련을 사정하다시피 했다. 대표팀 훈련을 오전에 재활하고, 오후에 훈련하는 것으로 선수들과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허 감독이 선수들 한 명 한 명을 불러 면담, 대화로 그들의 마음을 돌렸다. 국가대표로서의 자긍심과 책임감을 얘기했던 것. 그는 “부상 선수를 교체할까도 생각했지만 일단은 소집한 12명의 선수들을 모두 데려가야 팀 분위기가 좋아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왼쪽 발목을 깁스한 하승진도 대회가 열리는 일본에 데리고 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선수들과 소속 구단들의 국가대표팀에 대한 배려(?)가 섭섭했던지 그는 “예전에 선수로 뛸 때는 국가대표 선발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고, 대표선수로 태릉에서 합숙할 때는 반드시 대표팀 감독이 되겠다고 생각했으며, 최근 대표팀 감독에 선발됐을 때 가슴이 뛰었다”고 덧붙였다.

이제 얘기를 ‘KCC 우승’과 지도자로 성공한 ‘허재’로 돌아가자고 했다.

‘농구 천재’에서 ‘농구 9단’으로, 그리고 이제 ‘농구 대통령’이란 별명처럼 허 감독은 현역 시절 최고의 선수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지난 1일엔 지도자로 나선 지 4년 만에 KCC를 2008~2009시즌 프로농구 챔피언으로 이끌어 감독으로서도 ‘성공신화’를 썼다.

한국 프로농구 역사상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우승을 맛본 주인공은 허 감독이 유일하다.

프로스포츠에서는 ‘스타 플레이어는 지도자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속설이 있다. 물론 프로야구의 선동열 감독과 프로축구 차범근 감독 같은 ‘명선수 출신 명지도자’가 있지만 대개 스타 플레이어 출신 감독들은 성공보다 실패가 많았다. 특히 프로농구에서는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 감독으로 우승을 차지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재작년에 팀이 꼴찌로 떨어졌을 때 온갖 비아냥을 들었죠. 참 힘들데요. 이번 우승으로 스타 출신도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한 것 같아 의미도 있고, 기분도 좋습니다.”

배짱과 힘, 기술의 삼박자가 맞아 떨어진 허재는 용산고 시절 한국 농구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로 탄생했다. 중앙대를 거쳐 1988년 기아자동차농구단에 입단하면서 실업농구도 평정했다. 허재의 농구는 특별했다. 상대와의 지나친 힘겨루기와 음주 파문은 종종 ‘안티 허재’를 만들기도 했지만 특출한 기량과 박진감 넘치는 움직임은 농구팬들을 열광시켰다.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투지는 그를 ‘미워할 수 없는 천재’로 만들었고 프로무대를 거치면서 그 누구도 오르지 못했던 ‘농구 9단’에 올랐다.

코치도 거치지 않고 KCC 감독으로 임명되던 2005년, 많은 농구인들은 그의 불같은 성격을 걱정했다. 직설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는 급한 성격 때문에 선수들은 물론이고, 심판들과도 숱하게 마찰을 일으키리란 우려였다. 사실 그의 성격은 불같고 괄괄하다. 하지만 그는 팀을 맡아 선수들을 지휘하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고, 스스로 노력하며 변신했다. 지금쯤 허 감독은 그의 ‘성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정말 성질 많이 죽었죠. 처음 감독이 될 때부터 주위 사람들이 그런 조언을 많이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일부러 성질을 죽인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연륜이 말해주는 것 같아요”라며 웃었다.

특히 올 시즌에는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지난해 드래프트에서 국내 최장신 센터 하승진(24·221㎝)을 영입해 기존의 서장훈(현 인천 전자랜드)과 함께 최고의 트윈타워를 구축, KCC는 우승 후보 1순위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서장훈과 출전시간 등을 놓고 트러블이 생기면서 허 감독은 그를 전자랜드로 트레이드했다. ‘스타출신 감독’의 한계를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허재 감독은 주저앉지 않았다. 오히려 과감한 승부수를 던졌다. 서장훈을 보내고 받아온 강병현과 기존의 추승균, 신명호를 중심으로 전력 재정비에 나섰고, 스피드 농구로 팀 분위기를 쇄신했다. 여기에 시즌 초반 잠잠하던 하승진이 폭발해 31승23패로 정규시즌 3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 챔피언의 자리까지 올랐다.

‘우승했을 때도 허재는 울지 않았다’는 신문 제목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아버지’였다. “다른 누구보다도 아버님께 큰 선물을 해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저를 키워주신 아버지께 지도자로서도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드려 기쁘죠. 얼마전 팔순잔치를 했는데 당뇨에 노환으로 몸이 좋지 않으세요. 우승은 언제 한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 작은 효도를 한 셈이죠. 아버지께서 잘했다고 하시더군요.”

그렇다. 허 감독의 ‘농구 인생’에 그의 아버지 허준(79)씨를 빼놓을 수 없다. 농구 선수 허재는 그의 아버지 허준씨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래전 허준씨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 허씨는 허재가 어렸을 적 형과 누나들에게 “절대로 막내를 주눅들게 해서는 안 된다”면서 아들의‘배짱’을 키웠다고 말했었다.

허씨는 동네벽에 농구공을 던지면서 패스 연습을 하다가 담벼락을 무너뜨리기도 하는 개구쟁이 막내 아들 때문에 금전적 손실도 있었지만 탓하지 않았다고 한다. 허씨는 “(허재가) 결혼하기 전까지 대신 갚아준 술값도 꽤 된다”며 “후배들과 마시느라고 그랬다는데, 인심은 잃지 않고 살아야지”라고 말했다. 허 감독의 주변에 후배들과 지인들이 많은 이유 중 하나다. 최고의 인기 스타였던 시절 가끔 무모한(?) 배짱으로, 특히 술로 인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지만 몸싸움이 격한 농구에서 상대의 기를 제압하는 ‘허재의 카리스마’는 그가 정상의 위치에 설 수 있는 추진력이었다.

허 감독의 선수 시절 강한 체력을 얘기할 때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이 허준씨가 억지로(?) 먹였다는 ‘뱀 이야기’다. 허씨는 허 감독이 용산중 1학년 때 허리를 다쳤을 때 체력을 키우는 데는 뱀이 최고라는 생각에 “한 번에 200마리씩, 1년에 3번씩, 그후 20년 동안 먹였다”고 밝혔었다. 한번은 뱀과 함께 지네를 먹은 허 감독이 기절하는 바람에 난리가 나기도 했다고….

아버지 허준씨가 아들을 ‘농구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면 허 감독의 두 아들들은 아버지를 보고 스스로(?) 농구 선수가 됐다. 3대에 걸쳐 농구를 하고 있는 것. “큰아들 웅(용산고1)이, 작은아들 훈(용산중1)이가 아빠 농구하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보고 참 좋아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외국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는 축구 선수로 키우려 했는데, 둘 다 원해서 농구 선수로 뛰고 있어요, 웅이는 184㎝, 아직 저보다 조금 작고 훈이는 166㎝입니다. 이제 배우는 과정이지만 잘했으면 좋겠고,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아빠에게 작전을 주문(?)하기도 해요”라며 뿌듯한 표정이다.

허 감독은…

▲1965년 강원 춘천 출생 ▲상명초등학교-용산중-용산고 ▲중앙대 체육교육학과 ▲1984년 농구대잔치 신인상, 어시스트상, 인기상 ▲1986년 아시안게임 농구 국가대표 ▲1988년 서울 올림픽 농구 국가대표, 기아자동차농구단 입단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국가대표 ▲1995년 농구대잔치 최우수선수상, ABC 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대회 MVP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국가대표 ▲1997년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MVP ▲2003년 TG삼보농구단 현역 은퇴 ▲2005년~ 전주 KCC 감독 ▲2009년~ 동아시아선수권대회 국가대표팀 감독

체육부장 kj59@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