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란 무엇인가.

지극히 철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이 질문에 의학자들이 답하고 나섰다. 최근 출간된 ‘인문의학, 고통! 사람과 세상을 만나다’(휴머니스트)에서다.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소장 강신익)가 엮은 책은 인간의 고통을 다루는 의학이 고통의 실존적 측면에 대해서는 왜 그토록 ‘무심’한지를 파고 들었다.

강 소장은 “고통이란 단순한 생리적 현상이기보다는 인간 실존의 울부짖음이며, 다른 사람의 참여와 도움을 청하는 몸과 마음의 상태”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근대 이후의 의학이 엄밀한 과학적 방법론에 크게 의존하게 됨에 따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주관적 현상에 대해서는 점차 관심을 갖게 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인간의 고통이 주요 대상인 의학에서 역설적으로 고통이 소외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됐다는 것이다.

특히 황임경 한림대 교수는 ‘고통, 의학과 삶의 만남’이라는 수록문에서 “의학적 고통과 삶의 고통을 내러티브(이야기 또는 담론)로 풀어낼 때 진정한 의학이 자리잡을 수 있다”고 주장, 눈길을 끌고 있다. 황 교수의 논지를 바탕으로 인문학적 시각에서 의학적 고통을 파악해보자.

◆ 근현대의학과 고통 = 근대의학은 질병과 이를 앓고 있는 인간을 분리, 사고함으로써 질병을 담지하고 있는 각 개인의 개별성을 소멸시켰다. 근대의학의 기계론적 인간관은 현대의학의 근거가 됐으며 질병의 고통을 단지 통증의 문제로 환원, 취급하게 됐다.

하지만 질병에 의한 고통은 단지 신체적 통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온전함(intactness)’이 위협받거나 훼손됐을 때 발생한다. 따라서 신체적 통증이 해결되더라도 고통은 지속될 수 있다. 질병은 그 자체로는 어떤 실존적 의미도 갖지 않는 ‘생물학적 사건’이지만 질병을 앓는 주체의 생활 세계라는 맥락에서 바라볼 땐 고통이 발생하고, 이에 따라 질병은 실존적·도덕적 의미를 갖게 된다.

예를 들어, 가슴에 심한 통증이 있을 때 우리는 혹시 심근경색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이 과정에는 환자의 경험, 지식, 사회적·문화적 배경 등 매우 많은 요소들이 관여한다. 즉 통증(아픔)이 개인의 총체적 삶에서 고유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 내러티브를 통한 고통의 이해 = 사실 통증이나 고통은 본래 타자와 함께 나눌 수 없다는 것이 그 본질적 성격이다. ‘나’의 두통이나 복통을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없으며, 질병으로 인해 실직을 하거나 이혼하게 됐을 때 그 고통을 아무도 똑같이 느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같은 질병과 고통을 방치할 수 없으며 어떻게든 이를 해결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의사의 진료과정에서 질병으로 인한 고통은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가. 바로 환자의 이야기를 통해서다. 고통은 신체적 통증과는 달리 의식 수준에서 발생하고, 몸이 아닌 인간이 경험하는 것이며, 환자가 통증 경험에 부여하는 의미나 중요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환자가 질병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황 교수는 “고통에 대한 의미 파악은 오로지 환자의 이야기, 즉 ‘질환 이야기(illness narrative)’를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낸다”며 “질환 이야기란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질병의 원인, 전개 과정, 치료나 질병 경험, 질병으로 인한 사회적·경제적 어려움 등과 같은 질병에 관련된 모든 것을 말로 풀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질환 이야기’가 환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질병 이야기라면 의사의 이야기는 흔히 ‘병력(medical history)’을 통해 드러난다. 한 마디로, 질병에 대한 의사의 이야기는 과학적 언어로 풀어낸 환자의 이야기다.

◆ 현대의학에서 내러티브의 중요성 = 우선 내러티브는 환자의 삶을 드러내준다. 환자는 내러티브를 통해 질병이라는, 자신의 생애에서 중요한 사건을 재구성하게 된다. 또한 내러티브를 통해 의료인들은 환자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임상의학은 기본적으로 환자의 이야기와 의사의 이야기가 만나는 장이며, 환자와 의사의 해석적 만남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당연히 내러티브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질병을 앓고 있는 당사자들이 느끼는 고통, 괴로움, 슬픔, 기쁨 등의 감정적 요소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를 드러내는 데 내러티브는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내러티브는 의학에서 고통을 드러내고 이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구이자 본질적 요소이며, 내러티브를 통해 환자와 의사 사이의 실존적 간극을 줄여나갈 수 있다.

황 교수는 “근대 이후의 의학은 환자들의 질환 이야기를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의학적 내러티브로 대체했고, 이에 따라 환자들의 목소리는 의사라는 대변자를 통해 걸러진 채 ‘의무 기록’ 속에 변형돼 남게 됐다”며 “소외됐던 환자들의 내러티브와 이에 반응하는 의사들의 내러티브가 의학의 중심에 자리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대의학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며, 내러티브를 통해 이를 키워나갈 수 있다고 그는 거듭 강조했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