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최욱경은 1970, 1980년대 미술대학을 다닌 화가 지망생들에게 전설적인 존재였다.

마흔여섯에 갑자기 숨진 그 여성 화가의 죽음을 애도했던 사람은 너무나 많다. 그리고 얼마 전 그의 사후 24년 만에, 아주 엉뚱한 기회로 그의 그림은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한꺼번에 받았다. 하긴 고급 공무원들 사이에 뇌물로 오갔다는 고가의 그림이 누가 그린 것인지에 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나처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거나, 꽤 그림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텔레비전에 비친 붉은색이 압도적인 최욱경의 그림 ‘학동 마을’은 그래서 내게 더욱 쓸쓸한 풍경화로 다가왔다. 통념적으로 가난한 화가인 우리가 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그림이다. 그런데 그 그림이 정겨운 선물을 넘어선 버거운 뇌물이 된 시대가 도래한 것일까? 세상이 그렇게 바뀌어가도 좋은 것일까? 아니, 그림이라는 죄 없는 사물 뒤에 다른 이야기들을 숨겨둔 것일까?

오래 전 신촌역 앞의 선술집에서 최욱경을 만난 적이 있다. 마른 몸매에 마흔이 넘어서도 소녀 같은 실루엣을 지닌 그는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가 1984년 겨울이었던 것 같다. 마치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기억하듯, 짧은 시간 동석했던 그녀와의 조우를 떠올린다. 지금 생각하니 마흔다섯의 그는 너무 젊었고, 스물여덟의 나는 그보다 훨씬 더 젊었다.

하지만 세월의 격차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젊은 그의 몸짓과 말투 속에 숨어 있는 영혼의 그림자는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특유의 맑음으로 차라리 조금쯤 불편했다. 결코 농담을 할 줄 모르는 그의 진지함과 그 표정에 새겨진 사무친 외로움이 떠오른다. 그 시절 나는 화폭 속에서 한없는 자유로움을 구가하는 화가 최욱경을 흠모했다. 요즘 젊은 작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이디어 지상주의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화가 자신의 마음과 정열과 힘과 사랑이 온통 그대로 드러나는 솔직한 그의 그림이 좋았다.

늘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있던 외로운 화가 최욱경의 이미지는 산문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남기고 아무 말 없이 세상을 떠난 1960년대의 전설적 인물 ‘전혜린’을 연상시켰다. 실제로 최욱경은 시집 ‘낯설은 얼굴들처럼’을 펴내기도 했다. 정말 낯선 얼굴들처럼 서로 스쳐 지나간 지 1년 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최욱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잠을 이루지 못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둥 아니라는 둥, 무성한 소문들과 함께 최욱경의 존재는 서서히 우리의 기억 속으로부터 희미하게 멀어져 갔다. 그동안 몇 차례의 유작전이 있었지만,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만난 강렬한 색채의 최욱경 그림은 내 젊음의 시간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나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가 숨진 나이보다 대여섯 살이나 더 많아져버린 나는 이제 누구나 한 살 더 먹어가는 나이라는 관념에 무감각하다.

화가들의 신년 모임이라 해서 나가보니 20여년 전부터 얼굴을 알고 지낸,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자리였다. 그들의 젊은 시절 얼굴을 기억하는 나는 까닭 없이 슬퍼졌다. 그들도 나를 보면서 마찬가지였을까? 얄미운 얼굴, 착한 얼굴, 밉상으로 기억되는 얼굴 상관없이 세월이 너무 흘러 그들이 마치 내 많은 얼굴들 가운데 한 부분으로 느껴졌다. 예전에는 무척 기분 나쁘게 느꼈던 그도 너무 사랑스럽고, 얄미운 그도 너무 반가웠다. 세월의 흐름이 좋은 점이라면 바로 이런 걸 거다.

한 해가 가고 또 새해가 오는데, 매일 새로운 일들로 어제의 일들이 까마득히 기억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가는 우리들 기억의 유효기간에 절망하면서, 나는 자꾸만 기억하려 애쓴다. 고마운 사람들에 관하여, 생각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일들에 관하여, 그럼에도 접지 못한 꿈에 관하여, 아니 그저 행복했던 순간들에 관하여, 지금은 가고 없는 아름다운 사람들에 관하여, 화가 최욱경에 관하여….

문득 엉뚱하게도 낯익은 노래 구절이 떠오른다.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황주리 / 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