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알카에다가 납치한 여객기가 충돌한 직후의 모습. ‘전쟁의 문화’의 저자 존 다우어는 미국의 지도자들이 자행한 전략적 실수가 국가 위기와 파국적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AP 연합뉴스

■ 전쟁의 문화
존 다우어 지음│최파일 옮김│아르테

‘패배를 껴안고’ 존 다우어 교수
이라크戰 - 진주만공습 등 비교
美日 지도자 망상적 신념 비판
선별정보 의존 반대 증거 외면

제왕적 대통령제 비판하면서
민주적·다원적 의사결정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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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한 집단이 공유하는 믿음과 가치관, 태도와 관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인간 행동을 규정하는 가장 밑바탕에 놓인 힘으로, 개인의 습관이나 행동 양식, 공동체의 도덕과 거래 양태, 집단의 협력과 투쟁 등 온갖 움직임을 결정한다. 나쁜 문화에 사로잡히면 전쟁과 같은 결정적 행위를 수행할 때도 자칫 비합리적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전쟁의 문화’에서 존 다우어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명예교수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을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과 비교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지도자들이 어떻게 ‘전략적 멍청함’에 사로잡혀서 국가 위기와 파국적 결과를 초래했는가를 다룬다. 저자는 일본 현대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로,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깃든 인종적 편견을 비판하고, 미국 중심 세계관을 비판하는 수정주의 역사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다. 일본의 전후 재건 과정을 살핀 역작 ‘패배를 껴안고’로 국내에 잘 알려져 있다.

다우어에 따르면, 알카에다의 9·11테러 이후 이라크 전쟁에 이르는 과정에서 미국 정책 입안자들이 빠져든 ‘전략적 멍청함’은 진주만 기습 공격을 감행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사고구조와 매우 유사하다. 히로히토(裕仁) 천황을 둘러싼 일본 군부가 미국을 오판하고 승리를 당연시했듯이, 조지 부시 정부의 고위직 인사들은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에 대한 신앙 수준의 믿음, 대규모 전쟁이 불가피하고 정당하다는 신념에 젖어서 편견과 희망적 사고, 백일몽과 망상에 포획됐다.

미국을 이끄는 세속의 사제들은 수시로 신의 뜻을 들먹이면서 미국이 수행하는 전쟁을 ‘성전’에 비유하곤 했다. 저자는 이를 ‘믿음 기반의 정책’이라고 부른다. 이 정책에 따르면, 세상은 ‘나와 적’ ‘선과 악’으로 나누어지고, 선한 자신의 전쟁 역량은 과대평가하고 악한 타인의 상황과 태도, 능력은 소홀히 취급하며, 우리 편 잘못은 감추면서 적의 위협은 과장하기 쉽다.

그 탓에 이들은 체리 피킹, 즉 보고 싶은 정보만 들여다보고 선별적 정보에만 주목하는 자기기만에 사로잡혔다. 집단 사고에 휩쓸려 숱한 반대 증거들을 무시한 채, 이라크에 있지도 않은 대량파괴무기의 흔적을 조작해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사실, 이들은 지나친 비밀주의에 사로잡혀 관련 정보를 시민들에게 공유하지도 않았고, 합리적 선택을 위장한 비합리적 판단에 대한 책임성도 부족했으며, 누구나 생각할 법한 평범한 상식조차 무시했다. 그 결과, 미국은 승리 없는 전쟁,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발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했던 일본이 다른 아시아 국가를 침략할 때 그러했듯이, 유색 인종에 대한 미국 특유의 인종주의적 편견은 ‘민간인 대량 학살’이라는 반인류적 전쟁 문화를 부추겼다. 20세기 초 미국 군대는 필리핀 전쟁에서 최소한 20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독일의 도시들에 소이탄을 퍼붓고 융단 폭격을 자행했으며, 결국 전략적 중요성도 별로 없는 소도시인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 폭탄을 떨어뜨려 수많은 시민을 학살했다. 국제법을 아랑곳하지 않는 이러한 전쟁 형태는 베트남 전쟁을 거쳐 이라크 전쟁에서도 반복됐다. 이 책에서 저자는 테러 폭격을 통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뜻하는 ‘충격과 공포’ 같은 미국 특유의 전쟁 수사가 어떻게 현실을 은폐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아울러, 저자는 1945년 이후 일본의 국가 건설과 재건 과정을 분석하면서 2003년 이라크 점령 정책이 실패로 돌아간 이유를 섬세하게 분석한다. 군대 해체, 공직자 숙청 등 일본에서 효과를 봤던 미국 정책은 이라크에선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문화적 바탕이나 제도적 기반이 없는 나라에서 강제로 정권을 교체한 후, 국가 건설의 어려움은 무시하고 막연히 시장에 모든 걸 맡긴 시장중심주의 사고 탓이었다. 그 결과 이라크는 대혼란에 빠져들어 테러가 만연한 불량 국가로 전락했다.

결국, 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건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비판과 민주적·다원적 의사결정과정이다. 미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대통령과 그 주변 인물들이 기존 법을 어기면서까지 집행 권한을 뻔뻔하게 확대하고 행사하는 데 열중하면 국가를 재앙으로 몰아넣는다. 버락 오바마는 말했다. “백악관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위험 가운데 하나는 모두가 모든 것에 동의하고 토론과 이견이 사라지는 일입니다.” 정부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고, 시민들의 참여가 보장되지 않는 나라는 언제든 전쟁의 문화에 빠져들 수 있다. 무리 행위와 집단 사고는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곳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까닭이다. 792쪽, 5만8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