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20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렉싱턴호텔에서 한나라당 심재철, 고승덕, 홍정욱, 김성회, 김금래, 안효대, 안상수(오른쪽부터)의원 등 세비 기부를 결의한 의원 20여명이 모여 기부처 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김동훈기자

쇠고기 파동, 화물연대 파업 등 짜증섞인 지난 한 주, 한여름 무더위에 한줄기 소나기 같은 시원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한나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자발적 세비(월급) 자진 기부 운동이 펼쳐진 것입니다. 국회의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일을 제대로 못했으면서 국민들의 세금을 축내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며 “세비를 걷어 좋은 곳에 쓰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정쟁과 암투만 일삼는 줄 알았더니, 모처럼 ‘기특한’ 일을 꾸몄습니다.

국회의원 세비 자진 기부 공론화의 시작은 지난 16일 문화일보 보도에서 비롯됐습니다. 국회가 열리지도 않았는데도 국회의원 299명과 고용 공무원(보좌진) 등에 총 90억여원의 세금이 처음 지급된다는 보도 내용이었습니다. ‘무노동 무임금’ 원칙에 입각해 불법 노조 파업 등에 비판적 태도를 보여왔던 의원들이 정작 자신들은 의원 임기 개시일로부터 7일째(6월5일)에 개원식을 갖도록 규정한 국회법을 어겨가며 국회를 열지 않았습니다. 국회의원의 대표적 의무가 법을 만들고, 정부를 감시하는 것인데, 사실상 ‘불법 정치파업’ 행태를 보인 것입니다. 심지어 구속 기소로 사실상 의원 활동이 불가능했던 의원들에도 한 달 월급이 국민 지갑에서 고스란히 지급됐습니다. 형사 피고인은 유죄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된다고 합니다.

집권 여당에서부터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16일 한나라당 의원 총회 자리에서 심재철 의원이 “아예 세비를 국민에게 돌려주자”고 제안 하면서 세비 자진 기부 운동이 본격 확산됐습니다. 네이버, 다음 등 주요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도 본지 보도가 나간 이후 국회를 열지 못하고 있는 의원들의 ‘무노동 유임금’ 행태를 비판하며, 국회의원의 세비 반납(혹은 환수)을 요구하는 여론이 불같이 일었습니다. 다음의 토론방 아고라에서는 ‘18대 국회의원의 6월 월급 90억 사회 환원’이라는 제하의 서명운동이 시작돼, 5일 만인 20일 참가 인원이 4000명을 넘어섰습니다.

세비 자진 기부 운동 참여에는 선수(選數), 계파 구분이 없었습니다. 물론 28명에 불과하지만, 최근 당내 권력 투쟁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한나라당이 모처럼 하나로 뭉쳤다는 의미 부여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20일 공개된 28명의 세비 자진 기부 참여 의원 명단에는 초선에서부터 4선인 안상수 의원, 6선의 정몽준 의원까지, 또 친 이명박 대통령계에서부터 정갑윤 의원 같은 친 박근혜 전 대표계까지 망라되었습니다.

‘민의의 대변자’임을 자처한 국회의원들이 국민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자리에서 선수와 계파를 따지는 일은 ‘일종의 사치’가 아니었을까요. 28명의 세비는 1인당 약 720만원(세금 제외)씩 총 1억9900여만원. 이날 모임에서 일부 의원들이 여름방학을 앞두고 결식 아동들을 위해 모금액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해 보건복지가족부 위탁기관인 지역아동정보센터 등에 기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여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보려는 일회성 정치 쇼’, ‘야당 등원 압박을 위한 교묘한 전술’이라는 비판도 제기됐습니다. 이를 의식한 듯 한나라당 내에는 28인의 운동에는 동참하지 않겠지만, 세비를 개인적으로 조용히 의미있는 곳에 기부하겠다는 의원들도 다수 있다고 합니다. 의도의 순수성을 떠나 이 같은 국회의원들의 세비 자진 기부 운동에는 부정적 측면보다는 긍정적 측면이 더 많아 보입니다. ‘지치(知恥)는 근호용(近乎勇)’이라고 했습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용기라는 뜻입니다. ‘무노동 유세비’에 대한 부끄러움을 자각하는 계기가 됐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국회가 조속히 개원돼 국회의원들도 떳떳이 세비 받으면서 일하는 날이 앞당겨지길 바랄 뿐입니다.

권로미기자 rom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