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이라는 말이 원래 뜬구름과도 같은 것이다. 잡힐 듯 하면서도 구체적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이런 불가시성이 서민의 특징이다. 서민은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다. 내세울 것도 없고, 하는 일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선거철만 되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가시권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서민과 비서민을 가르는 경계도 불투명하다. 빈곤계층을 지칭하는지, 거기에 중산층을 더할 것인지, ‘강북’처럼 특정 지역도 포함하는 것인지 합의된 정의가 없다. 강금실-오세훈 서울시장 후보간의 난데없는 ‘서민논쟁’이 서민을 위해서 무얼 하겠느냐가 아닌, 서민이 과연 누구냐 하는 ‘국어사전 뒤지기’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래도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 생활 속에서 스트레스를 느끼면 서민”이라는 오 후보의 언급은 꽤나 흥미로운 발상이다. 시비를 따지기 이전에, 서민 개념을 입체적으로 들여다 볼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다. 같은 화법의 상반된 논리도 있다. 청와대 앞에 횟집을 낸 이강철 대통령정무특보의 부인이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 특보는 정치적으로 실세일지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서민이다.”

원래 ‘서(庶)’는 ‘다양하다’는 뜻도 있지만 용례들을 보면 중심, 또는 원류에서 벗어나 있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본처 자식이 아닌 서출(庶出)이나, 비슷해보여도 진짜는 아닌 서기(庶幾)라는 말이 그렇다. 사회나 집단의 주류를 은연중에 설정해놓고 거기에 끼지 못하는 부류를 일컫는 것이다. 속된 말로 ‘끗발’에서 밀리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서 그런 끗발의 근원을 권력과 부(富)라고 할 때 거기에서 배제된 사람이 서민인 것은 맞다. 다만 재력이 있으면서도, 또는 권력이 있으면서도 한 쪽이 부족하다고 서민인양 하는 것은 속임수다.

강-오 두 후보는 어떨까. 강 후보가 “부끄럽지만 집이 없다”고 하고, 오 후보가 “재테크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다”고 했을 때 동류의식을 느낀 서민은 없었다. 그들이 월 1500만원 소득을 이야기하는 순간, 아니 그 이전에 서울시장 유력 후보가 된 것만으로 이미 서민의 대척점에 서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서민이, 또는 서민적이 아니라고 해서 분노하는 ‘서민’은 별로 없다. 그들이 웃으며 다른 세상의 얘기를 할 때 그저 픽 웃고 넘길 뿐이다.

사회 구성원을 ‘섬바디(somebody)’, 즉 특별한 사람과 ‘노바디(nobody)’ 곧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나눈 로버트 풀러 전 미국 오버린대 총장은 그런 차이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문제는 섬바디가 지위·명예에 따르는 절제와 희생을 지키지 못하고 남용과 차별을 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런 구분법은 우리에게도 통용된다. 이른바 서민들은 지도자가 자신들의 모습을 흉내내기보다는 그 지위에 걸맞은 행동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소설가 김훈이 통렬하게 지적한 대로 “귀족정신을 모조리 쳐부수어야 서민의 낙원이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지도자가 귀족의 명예심을 잃을 때 서민의 지옥은 시작된다.”(‘밥벌이의 지겨움’)

두 후보는 지금도 ‘서민을 감싸고’‘서민의 고민을 경청한다’며 쪽방촌을 방문하고 노숙자 지원센터를 누비고 있다. 굳이 강북에 선거사무실을 마련하고 귀고리도 떼낸 모습까지 뭐라 할 순 없다. 그러나 그들은 지방자치단체장의 본분을 착각하고 있다. 서울시장이 챙겨할 대상은 서민이기 이전에 시민이다. 청계천 사업이 큰 박수를 받은 게 어디 서민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겠는가.

서민의 고통에 눈감으라는 뜻이 아니다. 빈곤퇴치는 나라님, 즉 중앙정부도 힘겨운 일이다.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겠다고 말을 앞세우기보다는 선거 후에도 그 아픔을 잊지 않고 작은 것부터 찬찬히 실천에 옮기면 되지 않겠는가.

시장이 할 일은 결국 시민의 편의와 권익이 보장되는 최적의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후보들은 시혜대상으로서 서민을 말하기 전에 권리와 책임을 갖고 주도적으로 시정에 참여할 시민을 얘기해야 한다.

[[김회평 /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