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세상은 읽고 또 읽어서 반쯤은 외워 버린 가전제품 매뉴얼 같지만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우리 딸만 옆에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비행기야, 안녕!” 해서 올려다보면 정말 하늘에는 비행기가 천천히 선을 그으며 날고 있고, “멍멍이가 지나가네!” 해서 두리번거려 보면 여지없이 길 건너 보도에는 강아지가 쫄랑쫄랑 지나가고 있다. “어? 뭐가 묻었네! 딸기를 먹어서 그렇구나!” 아이에게는 내복에 묻은 얼룩조차도 관찰의 대상이고 감탄의 대상이라 옆에 있는 나까지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덕분에 나도 아이 눈을 통해 보도블록 사이로 돋아난 민들레며, 누군가의 발에 납작하게 밟힌 솔방울이며, 새잎이 돋아난 산울타리 같은 것들을 새삼 감탄하며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딸이 바라보는 세상은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 것들로 가득할까? 우리 딸에게 하루하루는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을까? 아직 세상에는 아이가 발견하고 배우고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는 것이다.

말을 배우면서 점점 더 많은 것을 보게 된 우리 딸이 글을 배우면 또 어떻게 될까? 아, 나는 진심으로 부럽다. 내가 이미 읽어 버린 그 수많은 어린이책들을 우리 딸은 처음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읽게 되겠구나. 얼마나 재미있을까?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릴까?

내 바람대로라면 우리 딸은 상상력이 반짝반짝 빛나는 책들을 가장 먼저 읽게 될 것이다. ‘피터팬’ 이나 ‘말괄량이 삐삐’ 처럼 거침없는 주인공들과 함께 종횡무진 모험을 하며, 놀랍고 진귀한 이야기에 귀기울이다 보면 가슴은 잔뜩 부풀어오르고 얼굴에는 함박 웃음이 떠오르겠지.

이렇게 부푼 가슴은 어렵고 힘들 때 딸아이에게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용기를 가지려면 ‘빨강머리 앤’ 처럼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게 만드는 책도 읽어야 한다. 고아에다가 온갖 구박을 받던 천덕꾸러기 아이가 전혀 굴하지 않고 자신을 갈고 닦아 마침내 성공을 이룬다니! 젠체하는 영웅담이나 위인전보다야 훨씬 낫다.

아름다운 주인공이 등장하는 책이라면 무엇이든 환영이다. 단, 공주님이나 텔레비전 스타처럼 얼굴만 아름다운 주인공은 절대 사양이고, ‘마당을 나온 암탉’ 의 잎싹처럼 볼품없지만 존재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주인공이라야 한다. 아름다운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그들이 살그머니 딸아이 마음 속으로 걸어들어와 단단히 자리잡을 테니.

나도 다른 엄마들처럼 내 아이가 자라면서 겪을 이런저런 괴로움들에 대해 꽤 염려하는 편인데 그중에서도 인간 관계에서 겪을 고통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을 졸일 정도다. 좋아하는 친구랑 사이가 틀어졌을 때, 다른 아이가 어쩐지 자기를 싫어하는 것 같을 때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을 테지? 그렇다면 아이가 좋은 책을 읽고 먼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힘을 길렀으면 좋겠다. 살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고 너그럽게 안아 주었던 몽실언니처럼. 결국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 진정으로 잘 어울리는 힘이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아이에게 지금부터 동시를 많이 읽게 할 생각이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마나 자주 감자” (권태응, ‘감자꽃’ ) 이런 동시야말로 지금 아이의 정신 세계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또 내가 동시를 권해 주고 싶은 또 다른 이유는, 지금 아이가 가진 반짝반짝 빛나는 눈과 사소한 것들을 가리키는 조그마한 손가락과 서툰 발음으로 애써 문장을 만들어 말하는 예쁜 입을 아주 오래도록 지켜 주고 싶기 때문이다.

＜동화작가·출판편집자＞